미국과 중국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통상 문제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해상 실크로드) 사업을 놓고 정면 충돌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17일(현지시간) 파푸아뉴기니에서 열린 APEC 최고경영자(CEO) 포럼에서 각종 현안에 대해 가시 돋친 설전을 벌였다.

시 주석은 포럼 기조연설을 통해 미국 우선주의로 대표되는 트럼프 정부의 보호무역주의에 일침을 가했다. 그는 “인류는 다시 한번 갈림길에 섰다”며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협력이냐 대결이냐, 개방이냐 폐쇄냐,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윈윈 발전이냐, (승자 없는) 제로섬 게임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이어 “냉전이든 열전이든, 또는 무역전쟁의 형태이든 역사는 대결에서 승자는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계는) 보호주의와 일방주의에 ‘노(No)’라고 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의 통상정책을 겨냥해 “근시안적 접근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시 주석의 이 같은 발언은 미·중 양국이 대화를 통해 현재의 갈등을 해결하자는 뜻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대신해 회의에 참석한 펜스 부통령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시 주석에 이어 단상에 선 펜스 부통령은 중국의 지식재산권 탈취와 국유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을 비난하면서 “중국이 그들의 길을 바꿀 때까지 미국은 행로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며 통상전쟁에서 먼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우리는 중국산 제품 2500억달러(약 283조원)어치에 관세를 물리고 있다”며 “중국이 미국 요구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관세 규모를 두 배 이상으로 늘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만 타협의 여지는 남겨뒀다. 이달 말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만나기로 했다며 여기서 진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양측은 시 주석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하는 일대일로를 놓고서도 설전을 이어갔다. 펜스 부통령은 “미국은 동반자들을 빚의 바다에 빠뜨리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독립성을 억압하거나 훼손하지 않는다”며 일대일로를 ‘수축 벨트’ ‘일방통행 도로’라고 비판했다. 일대일로와 관련한 사회기반시설 건설을 위해 중국의 차관을 받은 국가들이 빚더미에 앉거나 차관을 갚지 못해 국가기반시설 운영권을 중국에 넘기는 일을 문제 삼은 것이다.

시 주석은 이런 비난을 미리 의식한 듯 앞선 기조연설에서 일대일로를 적극 방어했다. 그는 “일대일로는 패권 추구가 아니며 이로 인해 주변 국가들이 빚더미에 빠지지도 않는다”며 “특정 회원국들에만 제한되는 비밀 클럽도 아니고 일부 사람들이 꼬리표를 붙인 것처럼 함정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은 포토 타임에도 지속됐다. 시 주석이 이번 정상회의 주최국인 파푸아뉴기니의 피터 오닐 총리 옆에서 사진 촬영할 때 펜스 부통령은 행사장을 떠나 버렸다.

미·중 간 다툼으로 회의 마지막날인 18일 정상들은 공동성명 채택에 실패하고 의장성명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정상들이 공동성명을 채택하지 못한 것은 1993년 첫 회의가 열린 이후 처음이다.

베이징=강동균/워싱턴=주용석 특파원 kd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