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는 시대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 그래서 모든 차들은 출시 당시에 유행한 디자인과 기술력을 판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편으로는 최근 연결성, 자율주행, 전기화 등의 첨단 기술이 강조되면서 옛 것에 대한 가치가 흐려지기도 한다. 이를 되짚어보기 위해 40년간 자동차 산업을 지켜본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이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클래식카 12대를 소개한다. 그 네 번째는 캐딜락 엘도라도, 람보르기니 미우라다.<편집자주>

-1959년형 캐딜락 엘도라도

미국 자동차 디자인의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하리 얼은 2차 세계대전 후 새 시대를 위한 참신한 디자인 모티브를 찾던 중 전쟁에서 활약했던 쌍동체 전투기 P-38의 두 꼬리 날개에 주목했다. 이후 그는 1949년 출시된 캐딜락 62에 테일 핀(Tail fin) 스타일을 처음 적용했다. 이후 테일핀 스타일은 미국 자동차 디자인을 강타해 1950년대 중엽부터 캐딜락의 테일핀 모방에 열을 올렸다.

테일핀 디자인은 1959년형 캐딜락 엘도라도 컨버터블을 통해 변혁을 거쳤다. 당시 새로 부임한 캐딜락의 수석 디자이너 척 조던이 디자인한 것으로 단순히 뾰족했던 테일핀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높아지고 크롬장식이 추가됐다. 역대 엘도라도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제품이자 1950년대 테일핀 디자인을 대표하는 차로 꼽힌다. 엔진은 최고출력 345마력의 V8 6,400㏄를 탑재해 ℓ당 3.4㎞의 연료효율을 냈다. 그러나 휘발유가 풍부하고 저렴하던 시기라 문제될 것은 없었다.

특히 핑크색의 엘도라도 컨버터블은 미국의 플레이보이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 `핑크 캐디(캐딜락의 애칭)` 붐을 일으켰다. 특히 락앤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핑크 캐딜락은 유명했다. 미국의 테일핀 열풍은 유럽에도 상륙해 영국의 오스틴과 모리스, 독일의 벤츠, 프랑스의 파셀베가 등이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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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형 람보르기니 미우라

2차 대전이 끝난 뒤 공군에서 전역한 기계공학도 출신의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불하받은 군용차를 개조한 농업용 트랙터 사업을 성공시켜 1948년 트랙터 제조사를 설립한다. 속도광이었던 람보르기니는 1950년대에 3대의 페라리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잦은 고장을 일으키자 1959년 페라리를 만든 엔초 페라리를 직접 만나 문제점을 지적해준다. 그러자 화가 난 페라리는 "페라리를 운전할 줄 모르는 인간은 평생 트랙터나 몰아라"라는 폭언을 한다. 이에 람보르기니는 페라리보다 더 우수한 스포츠카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페루치오는 1963년 람보르기니 자동차 회사를 세우고 수공 방식으로 제작한 첫 350GT(V12 3,500㏄ 360마력)를 내놓았다. 이어 1966년에는 V12 4,000㏄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380마력, 최고속도 280㎞/h의 GT40, 일명 미우라 P400을 공개해 업계의 파장을 일으킨다.

미우라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직접 붙인 브랜드명으로 이슬레로, 가야르도, 무르시엘라고 같이 걸출한 투우용 소들을 길러낸 사육사 돈 안토니오 미우라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P400으로만 불렸다. P는 Posteriore(뒤쪽)의 앞 글자를 딴 것으로, 엔진을 차체 뒤쪽에 배치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400은 엔진 배기량을 뜻한다. 1971년 등장한 미우라 P400SV는 'Super Veloce(굉장히 빠른)'의 줄임말로 96대가 제작됐다.

미우라는 페라리보다 우아한 스타일과 속도, 성능에서 완전히 앞선 차라는 평가를 받았다. 엔진을 운전석 뒤에 가로로 배치하는 특이한 미드십 구조와 마르첼로 간디니의 역동적인 디자인은 큰 충격을 몰고 왔다. 마르첼로 간디니는 당시 20대 후반의 나이로 베르토네 스튜디오에서 수업을 받고 있던 젊은 디자이너였다. 그는 경험이 부족해 자동차 디자인의 기본이나 인체공학을 따지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페루치오는 기성 디자인에 얽매이지 않는 차체를 마르첼로에게 요구했고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멋진 차가 탄생했다.

P400은 1966년 275㎞/h의 최고속도로 가장 빠른 양산차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러나 페라리 365가 1968년 280㎞/h로 기록을 갱신하자 1970년 P400S의 출력을 강화, 288㎞/h를 달성해 타이틀을 되찾았다. 이후 385마력을 내는 V12 3,939㏄ 엔진을 장착한 P400SV로 290㎞/h를 기록, 1984년에 페라리 288 GTO의 등장 전까지 최고를 유지했다. 가격은 피아트 중형 승용차 16대 값인 770만 리라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성능에 비싸지 않은 적당한 가격을 자랑했던 세계 최고의 스포츠카였다.

미우라 역시 명사들의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1971년 이란의 마지막 샤(Shah : 왕)인 무하마드 레자 팔레비는 차대번호 4934를 새긴 붉은색 미우라 SVJ를 비밀리에 구매해 그의 성 모리츠 샬레로 운반했다. 팔레비 왕은 2,000대가 넘는 벤츠와 랜드로버 레인지로버를 포함한 3,000대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극도의 부정부패와 사치, 오만 때문에 1979년 1월 이란 이슬람 혁명이 발생, 이집트로 망명했다. 많은 자동차는 물론 보석, 예술품, 보물, 비행기 등의 막대한 재산은 가져 갈 수 없었다. 팔레비의 창고엔 요르단 후세인 왕이 선물한 메탈릭 그린 색상의 1974년형 페라리와 미우라 P400SV, 롤스로이스, 캐딜락, 다임러 등의 고급차 10대가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1980년 7월 팔레비 왕이 암으로 사망한 후 이들 중 일부가 아랍에미레이트의 수집가에게 팔렸다. 특히 미우라 SVJ는 팔레비가 망명길에 올랐을 때 이란 정부가 소유했다가 1995년, 두바이로 팔려나갔다. 그러다 1997년, 영국의 브룩스 옥션을 통해 할리우드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45만 달러에 낙찰됐다. 케이지는 이 투기 때문에 한 동안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6년간 보유하다 2002년, 타인에 판매했고 그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

람보르기니는 미우라 이후 쿤타치, 디아블로, 가야르도, 무르시엘라고, 아벤타도르, 우라칸 등을 내놓으며 페라리와 쌍벽을 이룬 채 세계 최고의 성능을 지닌 차, 가장 비싼 자동차, 첨단 스타일의 슈퍼카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1970년부터 국내의 거센 노동쟁의와 석유파동으로 경영난에 빠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는 회사를 매각한 후 은퇴했다. 이후 87년 미국의 크라이슬러가 매수한 뒤 94년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아들이 소유하고 있는 세도코 그룹으로 넘어갔다가 1998년 폭스바겐그룹이 인수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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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