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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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시바(東芝)의 반도체 자회사인 도시바 메모리가 결국 SK하이닉스가 포함된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에 매각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6월 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인수전에서 승기를 잡은 듯했던 한미일 연합은 한때 도시바의 오랜 사업 파트너인 미국 웨스턴 디지털(WD) 진영에 밀려 인수전에서 탈락하는 듯했으나 결국 다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20일 일본 언론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도시바는 한미일 연합 진영에 도시바 메모리를 매각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아직 주식 매매계약(SPA) 계약을 체결하는 단계까지는 진전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도시바가 당초 이달 중 계약 체결까지 마무리하겠다고 밝힌 만큼 다음 주께 열릴 이사회에서 최종적으로 매각 계약에 대한 의사결정이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연합이 제안한 최종 인수가는 2조4천억엔(약 24조6천억원)으로 알려졌다.

이는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때 제안한 인수가 2조엔보다 4천억엔 늘어난 것이다.

한미일 연합은 연구개발비 4천억엔을 추가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언론 등에 따르면 투자액은 베인캐피털과 SK하이닉스가 5천675억엔을 함께 투자하고, 도시바가 2천500억엔, 애플이 3천억엔을 대고 나머지 투자자들이 남은 액수를 분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 가운데 애플의 투자액은 당초 30억 달러에서 70억 달러(7천억엔)로 증액됐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 중 10억 달러는 자산, 60억 달러는 부채(융자)로 조달될 것이라는 보도다.

SK하이닉스는 이번 투자액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이전에 SK하이닉스가 2천억엔(2조3천억원) 정도 투자할 것으로 추정 보도했다.

한미일 연합에는 컨소시엄을 주도하는 미국 사모펀드(PEF) 베인캐피털 외에도 SK하이닉스와 미국의 애플, 델, 시게이트, 킹스턴 테크놀로지 등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마트폰 제조업체인 애플, PC·노트북 제조사인 델, 데이터 저장업체인 시게이트, 컴퓨터 회사인 킹스턴 등은 모두 도시바 낸드플래시의 고객들이어서 이들이 투자·출자자로 참여한다면 도시바로서는 안정적인 거래처를 확보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미일 연합과 도시바는 향후 도시바 메모리의 지분 구조를 베인캐피털 측이 49.9%, 도시바가 40.0%, 일본 기업이 10.1%씩 분점하는 계약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지분율은 실제 투자·출자 금액과 비례하는 구조는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를 통해 일본 측 지분율을 과반(50.1%)으로 유지해 도시바 메모리의 경영권을 확보하겠다는 셈법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초 한미일 연합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될 당시 베인캐피털 쪽이 지분의 51%를 보유해 경영권을 확보하겠다고 제안했던 것과 달라진 것이다.

전환사채(CB)를 통한 출자로 향후 의결권을 확보하려던 SK하이닉스의 지분율은 15% 이하로 제한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기업이 또 다른 반도체 회사를 인수하면서 앞으로 진행될 각국 반독점 당국의 심사에서 논란의 소지를 줄이기 위한 대응 조치로 풀이된다.

SK하이닉스로서는 흡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향후 일정 부분 경영에 관여하며 도시바와 기술 협력 등을 모색할 수 있는 지렛대를 확보한 셈이다.

모바일 디바이스와 데이터센터 등의 수요로 큰 성장이 기대되는 낸드플래시 부문에서, SK하이닉스가 도시바의 선진기술을 확보하면서 좀 더 영향력 있는 플레이어로 부상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매각 초기 시장의 관측과 달리 도시바 메모리를 통째로 사들이는 인수가 아니라 지분 투자를 하는 형태에 가깝다 보니 도시바와 SK하이닉스의 시장 점유율이 합산되는 효과는 생기지 않는다.

당장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점유율이 수직 상승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럼에도 향후 협업이나 공동 연구개발(R&D) 등을 통해 기술 경쟁력을 높일 가능성은 열려 있다.

낸드플래시 시장 1위인 삼성전자가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SK하이닉스가 앞으로 도시바와의 시너지를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할 여지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특히 최근 '반도체 굴기'를 외치며 대규모 투자에 나서고 있는 중국 자본에 도시바 메모리 사업이 넘어가는 것을 차단한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 자본을 등에 업은 저가 경쟁이나 대규모 생산 확대 등의 '치킨 게임'이 업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정성호 기자 sisyph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