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의 대표 공약인 ‘빚 탕감’의 구체적인 밑그림이 조만간 나온다. 4일 정부에 따르면 국정기획자문위원회는 ‘국민행복기금이 보유 중인 10년 이상, 1000만원 이하 장기·소액연체 채무자의 빚을 전액 탕감해주겠다’는 대통령 공약 이행방안을 이달 말께 발표한다. 정부 관계자는 “빚 탕감 대상자, 탕감 방식 등을 국정기획위와 금융위원회가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빚 탕감의 실행방안을 놓고 국정기획위 내에서 신중론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 연체자’란 낙인이 찍혀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서민·취약계층의 부담을 덜어주자는 당초 취지와 달리 형평성 논란, 도덕적 해이 확산 등 부작용이 상당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40만명 '역대급 빚 탕감'…모럴해저드 논란
처음 나오는 100% 빚 탕감 정책

‘빚 탕감’ 공약의 대상은 국민행복기금이 관리하는 장기연체 채무자다. 2013년 3월 출범한 국민행복기금은 은행, 상호금융, 대부업체 등 4211개 금융회사로부터 연체채권을 사들인 뒤 채무조정을 통해 빚을 줄여준다. 빚의 30~90%를 탕감해주고 나머지 빚을 최장 10년간 나눠 갚도록 하는 식이다. 국민행복기금이 지금까지 사들인 연체채권은 45조2000억원어치, 채무자는 287만여 명이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30만7000명이 빚을 모두 갚는 등 58만여 명이 채무조정을 받았다. 남은 채무자 256만3000여 명 중 문 대통령의 빚 탕감 공약인 ‘빚 1000만원 이하, 10년 이상 연체’ 조건에 해당하는 채무자는 123만3000명가량이다. 당초 국정기획위는 이 중 채무조정에 응하지 않고 있는 미약정자 40만3000명을 우선 탕감 대상으로 고려한 가운데 대상자 기준을 가다듬고 있다.

아직까지 공약 이행방안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역대급’ 빚 탕감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많다. 과거 정부도 규모와 내용에 차이는 있으나 채무조정 정책을 추진했지만 100% 빚 탕감을 들고나오지는 않았다는 점에서다.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이자 면제, 채무 일부 탕감 후 분할상환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빚 탕감은 민간 금융권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주요 민간은행이 소멸시효(5년)가 지난 연체채권 소각에 속속 나섰다. 올 들어 신한은행 1만9424명, 우리은행 1만8623명, 국민은행 9만7000명 등 장기연체자의 빚증서를 없앴다. 은행권 관계자는 “연체채권을 소각하면 장기 채무연체자들의 연체기록이 삭제되고, 통장 개설 등 금융거래도 재개할 수 있다”며 “포용적 금융을 내세운 새 정부 기조에 맞춰 은행 등 금융권의 연체채권 소각이 이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티면 된다” 모럴해저드 확산

빚 탕감 정책은 큰 논란을 초래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빚 탕감에 찬성하는 쪽은 ‘현실적인 이유’를 든다. 1000만원 이하 금액을 10년 이상 연체한다는 건 사실상 ‘빚 상환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장기연체자들은 명백한 경제적 취약계층”이라며 “빚을 안 갚는 게 아니라 못 갚는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빚을 없애주고 새출발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단체인 주빌리은행(공동은행장 유종일 KDI 교수, 이재명 성남시장)은 더 과감한 주장을 편다. “국민행복기금을 청산해 모든 연체채권을 없애야 한다”고 새 정부에 요구했다. 국민행복기금 자체가 민간 금융회사의 서민·취약계층 대상 빚 독촉사업을 정부가 대신 맡아서 약탈적 추심을 하는 것이란 게 주빌리은행의 주장이다.

하지만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우선 형평성 논란이 나올 전망이다. 900만원을 10년 이상 안 갚고 버티면 빚을 탕감받는데, 똑같은 빚을 성실히 갚고 있는 사람은 탕감 혜택을 못 볼 수 있다는 지적이다.

금융위도 국정기획위에 ‘누구는 탕감해주고 누구는 안 해주느냐’는 비(非)수혜그룹의 반발이 클 것이란 의견을 전달했다.

김형주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가 소득, 재산 유무 등 엄격한 심사를 거쳐 대상자를 선별한다지만, 10년만 버티면 빚 갚을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도 “빚 탕감은 채무자들에게 돈을 벌어 빚을 갚겠다는 의지보다 또 다른 부채 탕감 정책을 기대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꼬집었다.

이태명/김순신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