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과 시각] 라뮈에트성에서 본 한국 경제의 명과 암
파리 서쪽 넓게 펼쳐진 불로뉴 숲 인근에 라뮈에트성(城)이란 고색창연한 건물이 있다. 16세기 프랑스 왕들의 사냥터 숙소였고 18세기에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왕비가 전염병이 번진 베르사유궁을 떠나 거주하기도 했는데 프랑스 혁명 전까지 절대군주정 무대에 등장하던 곳이기도 하다. 라뮈에트성은 2차대전 동안 독일 해군 정보사령부의 본부가 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는데, 1948년 유럽 재건을 위해 설립된 유럽경제협력기구(OEEC)가 이곳에 둥지를 텄다. OEEC는 1961년 미국 등 참여하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재출범하며 냉전체제 군사동맹의 축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함께 서방 경제동맹의 핵심역할을 수행했다.

1980년대 말 냉전 종식 후 새로운 존재이유를 찾아야 했던 OECD는 영향력 확대를 위해 회원국을 늘리기로 했다.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와 동유럽 국가 등이 가입하며 점차 글로벌 경제기구로 변모했다. 설립 50주년인 2011년에는 ‘글로벌 정책 네트워크’로의 변신을 선언, 이후 신흥국과 협력을 강화하며 부자클럽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더 나은 정책(Better Policies for Better Lives)’을 모토로 객관적 분석을 토대로 한 정책 조언을 회원국들에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 역사의 장(場)이었던 라뮈에트성은 이제 글로벌 정책협력의 요람이 되고 있으며 프랑스 언론은 OECD 발표를 인용할 때 ‘라뮈에트성의 전문분석가 의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라뮈에트성에서 한국의 OECD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이달 열렸다. 앙헬 구리아 사무총장은 “한국의 경제발전이 다른 나라에 영감을 줬고 OECD의 귀중한 동반자가 됐다”고 평가했다. 1996년 가입 당시에 비해 경제규모가 급신장하고 제도가 선진화됐으며 국제위상이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냉정히 평가해서 아직 멀었다. 성장률, 연구개발투자 등 경제 외형적인 지표는 괜찮지만 대기오염, 근로행태, 성 차별, 노인빈곤 등 국민 삶과 관련된 지표는 하위권이며 내면적, 질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곳의 평가다. 지금껏 앞만 보고 달렸다면 이제는 옆도, 뒤도 보며 함께가야 한다는 우리 인식과도 맥을 같이한다.

라뮈에트성의 전문가와 외교관들은 최근 한국 상황에 대해서도 관망하고 흥미로워하지만 특별한 위기로 보는 시각은 드문 것 같다. 그러나 우리 경제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으로 탈바꿈하려면 견제와 균형, 역할과 책임이 불분명한 지배구조, 제도와 사회에 대한 불신, 커진 몸집에 걸맞지 않은 의식과 관행을 고쳐야 한다. OECD 회원국 요건이자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이기도 한 ‘민주주의, 시장경제, 인권’의 가치를 지키려면 공동체를 구성하는 타인에 대한 존중,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 법·원칙의 준수가 수반돼야 한다. 절제와 배려 속에 중지가 모아져야 돌덩이처럼 굳어져 어깨를 짓누르는 구조적 문제도 풀 수 있다. 사회적 갈등 비용과 시행착오를 줄이려는 경험적 산물이겠지만 선진국들의 유연성, 투명성, 포용적 자세가 많이 부럽다.

“눈길을 걸어갈 때 / 어지러이 걷지 마라 /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 뒷사람의 길이 되는 것이니”라는 옛 성현 말씀이 있다. 험난했던 반세기 성장과정에서 선진국 정책사례는 우리에게 좋은 길잡이였다. 이제 우리 발전경험도 다른 나라가 따르는 발자국이 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위기 때마다 슬기롭게 극복하는 한국의 저력을 믿고 있다. 당면한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지금의 고민과 선택이 훗날 남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기를 세밑에 간절히 바란다.

윤종원 < 주 OECD대사 jwyoon15@mofa.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