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중소기업인이 '생업 터전' 내놓는 까닭
어둠이 내린 경기 시흥시의 한 금속가공 공장. 불황에도 이 회사는 일감이 밀려 잔업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이 공장으로 남루한 작업복을 입은 한 중년이 들어섰다. 금속가공업체 L사장을 만난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장님, 혹시… 우리 공장을 좀 사주실 수 없나요.”

자기 공장을 팔려고 하는데 살 사람이 없어 찾아왔다는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그가 불쑥 방문한 것은 밤마다 불이 켜 있고 기계소리가 들리니 ‘잘나가는 기업’이라고 판단해서다. 중소기업인이 생업의 터전인 공장을 파는 것은 단칸방에 사는 서민이 빚에 쪼들려 마지막 수단으로 집을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이를 파는 것은 경기가 나쁘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기 때문이다.

“차나 한잔 하시지요. 제가 생각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원천기술 부족이 핵심 원인

같은 중소기업인으로서 L사장은 그의 딱한 사정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이 올 들어 이미 열 명이 넘었다고 한다. 부동산중개업소를 통해 공장 매입 의뢰가 들어온 것을 포함하면 30건을 훌쩍 웃돈다.

이 지역 공장 지대에는 차디찬 바닷바람이 분다. 인근 음식점에도 연말의 흥청대는 분위기는 사라졌다. 경기침체로 전국의 제조업 평균 가동률이 70% 선에서 턱걸이하다 보니 야근하는 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한창때는 서너 집 건너 한 집꼴로 잔업을 하고 밤에도 프레스 소리가 울렸던 곳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깝게는 주력업종 불황의 직격탄을 맞은 것이고, 멀게는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다. 이 지역은 ‘자기만의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보다 대기업 2, 3차 협력업체가 많다. 기계 자동차 전자 분야의 부품생산업체와 뿌리기업들이 몰려 있다.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한마디로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원천기술이 부족하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문제는 기업인 혼자 열심히 뛴다고 이 과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필요한 연구개발을 적절히 지원받을 수 없고, 부족한 생산직 인력과 연구개발 인력을 구할 수 없는 시스템 속에서 경쟁력이 생길 리가 없다.

R&D·인력 정책 대수술 필요

어떤 식으로 바꿀 것인가. 독일이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을 연구소가 도와주는 프라운호퍼식 연구시스템, 대학보다 전문계 고교 중심의 교육제도, 재무제표보다 기술력을 평가해 어려울 때 대출을 늘려주는 ‘관계형 금융’ 등을 검토해야 한다.

기업도 핵심기술 개발에 전력을 쏟아야 하지만 우수 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중견·중소기업으로선 이를 구현하기 힘들다. 판교에 준하는 수도권 요지에 전통기업 연구개발센터를 만들 필요가 있다. 이곳에 국내 주요 연구기관과 중소기업 연구소가 밀집된 클러스터를 만들어 협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역시 이들 클러스터를 통해 대비할 필요가 있다.

새해에는 공장을 내놓는 기업이 줄어들어야 한다. 수십년 갈고 닦은 중소기업들의 노하우가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이를 복원하는 데는 또다시 오랜시간이 걸린다. 정책 당국자들과 중소기업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연쇄부도의 쓰나미가 몰려오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