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올 들어 매입한 국채 규모가 연간 목표 80조엔(약 808조원)에 크게 못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은행도 양적완화 규모 축소(테이퍼링)로 접어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국채매입 규모 줄인 일본, 테이퍼링 시작하나
일본은행이 추가로 사들일 수 있는 국채 물량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데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엔화가 약세를 보이면서 자연스럽게 국채 매입 규모를 줄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는 분석도 많다.

◆매입 규모 70조엔으로 줄일 수도

12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일본은행의 올해 국채 순매입액은 지난 주말까지 71조7000억엔에 그쳤다. 작년 같은 기간 75조3000억엔은 물론 일본은행의 연간 국채 매입 목표에도 크게 미달한다.

일본은행은 국채 매입 규모를 2013년 4월 연간 60조~70조엔에서 2014년 10월 80조엔으로 늘렸다. 그 결과 시중 본원통화 잔액이 지난달 말 419조엔으로 2013년 3월 말과 비교하면 세 배 가까이로 불어났다.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 취임 이후 꾸준히 돈을 풀어온 일본은행은 지난 9월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정책 목표를 ‘통화량’에서 ‘금리’로 전환했다. 단기금리는 마이너스를 유지하고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연 0% 수준에서 관리하기로 했다. 연간 80조엔 정도 국채 매입 규모를 유지한다고는 했지만 10년 만기 국채금리가 0% 근처에 있으면 금리를 낮추기 위해 채권을 추가로 사들일 필요가 없다. 이를 놓고 구로다 총재가 자산매입 한계를 인정하고 테이퍼링을 시사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기노시타 도모 노무라증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국채 수익률 곡선 관리(장·단기 금리차 확대)를 위해 일본은행이 자산을 연간 80조엔까지 매입할 필요가 없다”며 “일본은행이 조만간 80조엔이라는 목표치를 하향 조정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나도메 가쓰토시 미쓰비시UFJ모건스탠리증권 선임채권애널리스트도 “10년 만기 국채금리 관리를 위해서라면 국채를 지나치게 많이 사지 않도록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17회계연도(2017년 4월~2018년 3월) 상반기 안에 통화 공급 확대 목표치를 현재 수준(약 70조엔)으로 하향 조정할 것으로 전망했다.

◆엔화 가치 115엔 아래로 급락

트럼프노믹스(트럼프 당선자의 경제정책)에 대한 기대로 엔화 가치가 다시 약세로 방향을 튼 점도 일본은행이 테이퍼링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 있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날 엔화 가치는 미국 경기 개선에 따른 미·일 간 금리차 확대로 10개월 만의 최저인 달러당 115엔 아래로 떨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더 나아가 일본은행이 긴축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일 간 금리차가 급격히 커지면 글로벌 자금이 일본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과도한 엔저(低)는 소비심리 침체를 불러와 경기회복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지난달 일본은행이 물가상승률 목표(2%) 달성 시점을 2018년께로 미룬 점 역시 추가 양적완화 의지가 약해졌다는 신호라는 해석도 있다.

구로다 총재의 임기는 2018년 4월8일 끝난다. 누가 차기 ‘디플레이션(경기침체속 물가 하락) 파이터’가 될지 시장에선 벌써부터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블룸버그는 구로다 총재가 물러나도 일본은행이 디플레이션과 장기전을 치르는 데 앞장설 사람이 있다고 보도했다. ‘미스터 BOJ(일본은행)’로 불리는 아마미야 마사요시를 그 주인공으로 제시했다. 일본은행에서 37년간 근무한 아마미야 일본은행 이사는 은행 내에서 통화정책을 짜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경제 브레인인 혼다 에쓰로 스위스 주재 일본대사와 이토 다카토시 도쿄대 교수 등이 구로다의 후임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도쿄=서정환 특파원 ceose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