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수사 본격화하자 총수에 불똥 튈까 '전전긍긍'
트럼프 변수 등 글로벌 환경도 불투명…경영계획 엄두 못내
"정부·국회 의사결정 필요한 분야는 차질 불가피"

재계팀 = 국내 주요 대기업들이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졌다.

여느 해 같으면 내년 경영계획과 차기 성장전략을 수립하고 연말 사장단·임원 인사 준비로 한창 눈코 뜰새 없이 바빠야 할 시기인 요즘, 올해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집어삼키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의 여파로 손을 놓고 있는 기업들이 대다수다.

3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 현대차, SK, LG, 포스코, 한화 등 주요 대기업들은 통상 4분기의 중점 과제인 내년 투자·경영계획 수립과 주력사업·신규사업 전략 작성을 앞에 두고 대부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전경련을 통해 미르·K스포츠재단에 거액을 지원한 대기업들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주요 기업들의 전략기획·대외협력 파트 등이 벌집 쑤셔놓은 듯한 상황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야권 일각과 검찰 안팎에서 과거 대선자금 수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대기업 총수들의 줄소환이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면서 기업들은 검찰 수사가 총수에게까지 직접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매년 4분기에는 내년도 투자와 경영계획을 수립하고, 주력사업과 신규사업에 대한 전략도 짜야 하는 시기"라면서 "기업들이 생존경쟁에 내몰려 있는 엄중한 상황인데, 이런 중요한 시기에 검찰 수사와 정치권의 압박이 심해지면 아무래도 경영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지고, 크고 작은 사업전략 수립과 운영에 차질이 벌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 4대 그룹, 저마다 검찰 수사에 안테나 세워
삼성은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승마 훈련과 컨설팅 자금 지원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면서 위기감에 휩싸였다.

갤럭시노트7 사태 수습과 이재용 부회장의 등기이사 선임 이후 신성장사업 발굴 등을 위해 역량을 집중해야 할 시기인데도 그룹과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삼성은 그러나 사장단회의, 각종 그룹 행사 등을 정상적으로 진행하면서 연말 인사도 차질없이 준비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현대기아차는 아직 사업계획 수립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통상 매년 11월 중순이나 11월 말 정도 각 본부가 내년도 사업계획을 제출하기 때문에 최순실 게이트에 따른 영향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태 여파가 어떻게 미칠지 예의주시하는 상황이다.

SK그룹은 수사의 영향을 받고 있어 상황을 좀 더 심각하게 보고 있다.

SK그룹은 K스포츠재단에 80억원을 추가 출연하라는 제의를 받았다가 거절한 것과 관련, 그룹의 대관 담당 박모 전무가 최근 검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SK그룹 역시 아직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을 끝내지 못했으며, 내년도 매출과 영업이익 목표조차 가늠이 어려운 상황인 만큼 투자와 채용 계획을 잡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은 최근 급박한 경영상황에서 최태원 회장 지시로 계열사마다 비상경영상황실인 '워룸' 설치도 추진하고 있을 정도다.

LG그룹은 구본무 회장이 이달 초부터 각 계열사 CEO와 사업부 본부장들로부터 올 한해 성과와 업적 등을 보고받았다.

LG는 통상 상반기에 전략보고회를 열어 중장기 사업전략을 세우고 연말 업적보고회에서 실적을 점검하고 내년도 사업계획을 논의한다.

구 회장은 지난달 임원세미나에서 업계 경쟁 양상과 환율 등 환경 변수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선제 대응을 강조한 바 있다.

포스코도 새해 경영계획을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다만, 내년 중 27건의 계열사와 자산 구조조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대내외 경영상황을 주시해 경영계획에 반영할 예정이다.

포스코는 "경영계획은 통산 1월에 전년도 실적을 발표하는 기업설명회(IR) 때 밝힌다"면서 "올해 특별히 늦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포스코 권오준 회장 임기는 내년 3월 말 종료한다.

권 회장은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데다가 지난 3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4년 만에 1조원을 돌파하는 등 경영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연임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최순실 게이트 여파로 포스코가 구설에 휘말린 것이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포스코 계열 광고회사 포레카를 인수한 중소 광고사가 지분의 80%를 내놓으라는 차은택 씨 측근 송성각 전 한국콘텐츠친흥원장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일감을 애초 계약된 것보다 적게 줬다거나 더블루K로부터 배드민턴팀 창단을 요구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포스코는 계획대로 계약물량을 집행하고 있고, 배드민턴단 창단 요구는 거절했음에도 관련있는 것처럼 보도되어 곤혹스럽다는 입장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국제 경제의 저성장 기조 등 기업을 둘러싼 환경 자체가 불투명하므로 사업계획 수립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며 "특히 국내에서 정부 의사결정이나 국회의 법안 통과를 기다리는 분야는 사업 지연 등 영향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경영계획 수립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게 사실"이라며 "채용이나 투자계획은 정부의 유관 부처와 협의를 거쳐야 하는데 솔직히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변수가 있는 상황에서 내년도 경영계획은 다 '깜깜이'로 짜야 하는 상황이라 난감하다"며 "내년은 '대선의 해'여서 경제민주화 이슈, 법인세 인상 문제로 반기업 정서가 확산할 수도 있는 점도 재계 입장에서는 불안하다"고 말했다.

◇ 미국 대선에도 촉각…보호무역 역풍 불까 노심초사
재계에서는 미국 대선 등의 영향으로 환율, 금리, 증시 등 여러 경제 변수들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국정 혼란 상태는 국가 경제를 더 불확실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기존 산업 구조조정은 물론 금융성과연봉제, 부동산 대책 규제개혁 등 경제체질 개선 과제를 충실히 이행해야 하지만 정부 경제팀마저 교체되고 있는 상황이라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대기업의 한 관계자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불확실성으로 기업도 투자·고용 등에 대해 보수적 계획 수립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 급격한 금리 상승과 정책 변화가 예상돼 금리, 환율, 증시에 모두 큰 충격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힐러리, 트럼프 모두 보호 무역주의 강화로 수출 등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힐러리가 당선될 경우에는 완만한 정책 전개와 시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관계자는 "트럼프가 당선되면 환율이 요동칠거라는 등 미국 대선의 불안정성이 있고, 유가는 산유국 감산 합의가 불발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인데다 국내는 '최순실 블랙홀'에 신임 경제부총리가 임명될 수 있을지 조차도 알 수 없어 경제 컨트롤타워마저 부재한 상황"이라며 "대내외 불확실성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특히 현대차는 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세계 경기와 미국 자동차 산업 전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보호무역주의를 천명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 자동차 수출 등에 부정적인 여파를 우려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도 최근 보고서에서 트럼프의 주장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면 타격이 가장 큰 산업은 자동차로 수출 손실이 133억달러(약 14조8천억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대한항공은 국내 정국이 불안정한 상황보다는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환율 변동 가능성 때문에 경영계획 확정 시기를 조금 여유있게 잡아놓고 주시하고 있다.

항공사 입장에서 환율은 내국인의 여행심리, 항공수요 등과 직결되기 때문에 경영계획이나 투자계획을 수립할 때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지표다.

구조조정 업종인 조선업계는 당장 내년도 연간 수주 목표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조선 업황이 내년에도 올해 못지않게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환율·유가 등 대외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통상 환율, 유가, 강재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사업계획을 수립하는데, 최근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서 내년도 계획 수립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조선 구조조정 등 산업 정책 방향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경제 수장이 갑자기 교체되는 등 국내 상황이 어수선한 점에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서울=연합뉴스) oakchu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