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Getty Images Bank
삼성 한화 CJ의 기업 이념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이다. 매일유업은 낙농보국, 동원그룹은 수산보국, 오뚜기는 식품보국을 내걸었다. 기업이 이뤄야 할 가치 맨 앞줄에 국가가 나온다. 식민지 시대, 가난과 배고픔의 시대에 기업을 시작한 창업자의 소망이 담겨 있다. 기업을 일궈 나라에 보답하는 것. 이들은 소망대로 기업을 키웠다. 일자리도 만들었다. 배고픔과 가난의 시대를 끝냈다. 세금을 내 국가를 운영할 재정적 기초를 닦았다.

이 과정에서 실수와 불법, 편법도 있었다. 반기업 정서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기업가들은 또 다른 도전을 통해 보국에 나서고 있다. 국가의 미래를 밝히겠다고 사재를 내놓기 시작했다. 국가 전략을 구상할 싱크탱크, 한국이 취약한 기초기술을 연구할 연구재단 등이 이들의 손에 의해 잇따라 탄생하고 있다.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성장한 한샘의 조창걸 명예회장, 아모레퍼시픽의 서경배 회장이 출범시킨 연구소와 재단이 그것이다. 인터파크 창업자 이기형 회장, 락앤락 김준일 회장도 재단을 세웠다.

앞서 대기업들도 연구소를 만들었다. 삼성 현대 LG 포스코 KT 등 대기업이 돈을 냈다. 이들 연구소는 한때 정부가 만든 싱크탱크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지금도 간혹 국가 아젠다를 제시한다. 하지만 더 많은 비중은 자기 기업을 위한 연구에 할애한다.
기업연구소 2.0 시대…"국가전략·과학 연구 책임진다"
새로운 연구소들이 대기업 연구소와 다른 것은 기업연구소란 호칭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기업이 돈을 낸 것이 아니라 기업인이 자신의 돈을 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돈을 낸 기업인들의 기업을 위해 연구하지 않는 게 차이점이다.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은 당초 싱크탱크 여시재의 이사회 멤버로 참여했다. 직접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그러나 여시재가 한샘을 위한 싱크탱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망설임없이 이사직을 내려놨다. “여시재는 한샘을 위한 연구소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연구소가 돼야 한다. 한치의 오해가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게 사임 이유였다. 여시재는 조 회장의 위기감과 기업가정신이 맞물려 탄생했다. 그는 중국의 성장, 일본의 보수화, 미국의 위상 변화 등이 자칫 한국을 구한말과 같은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고 했다. 새로운 국가전략이 필요하다며 싱크탱크를 위해 재산의 절반을 내놨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은 한국이 가장 취약한 생명과학 기초연구를 위해 사재를 털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기초과학 연구를 책임지겠다며 명함도 ‘서경배과학재단 이사장’으로 팠다. 연구 결과물은 아모레퍼시픽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라고 했다. 서 회장도 보국을 말했다. “수많은 인연이 오늘의 아모레를 만들었다. 그 보답을 사회에 크게 돌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한국 1호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의 이기형 회장은 ‘과학 대중화’를 목표로 카오스재단을 설립했다. 이 회장은 “과학은 자연을 탐구하는 것을 넘어 삶을 지배하는 철학이자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중요한 영역”이라고 말했다. 일반인이 과학에 더 쉽게 다가가게 함으로써 국가에 기여하겠다는 얘기였다. 밀폐용기 업체 락앤락 김준일 회장의 주제는 아시아다. 세상의 중심이 아시아로 옮겨오고 있는 이때, 한국이 이를 주도해야 한다며 ‘아시아발전재단’을 만들었다. 아시아 문화 관련 학술교류와 장학금 지원, 동남아 지역 전문가 육성에 나설 계획이다.

한국인들은 기업에 불만이 많다. 가난과 배고픔을 벗어나자 왜 한국에는 GE 도요타 애플 같은 회사가 없느냐고 했다. 브루킹스재단도,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국 기업인들은 이런 시대의 문제들을 하나 하나 해결했다. 또 하고 있고, 할 꿈을 꾸고 있다. 가난과 배고픔을 해결한 것은 사업보국, 낙농보국, 식품보국을 외치며 나선 기업인들이었다. 현대차는 도요타의 대안으로 성장했고, 삼성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애플의 유일한 경쟁자가 됐다. 발렌베리 가문을 꿈꾸는 것도, 브루킹스재단을 만들겠다고 나선 것도 기업인들이다.

이들이 만든 연구소와 연구재단이 한국의 미래에 어떤 역할을 할지는 쉽게 점칠 수 없다. 하지만 국가와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기업인들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