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맞은 조선 사외협력사들 무너진다
경남 고성 등 해안가 업체들 줄줄이 문 닫거나 법정관리행


대형 조선소들과 거래하는 사외 협력사들이 몰려 있는 경남 남해안에 불황의 그늘이 짙다.

조선소 발주 물량이 줄면서 사외 협력사들 중 문을 닫는 곳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 경쟁력을 가진 국내 조선산업을 지탱하는 기둥들이 조선소 바깥에서부터 차례로 무너지는 상황이다.

경남지역 시중은행의 한 지점장은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전화를 몇군데 돌리는게 요즘 일이다.

자금을 빌려준 조선소 사외 협력사 사장이나 공장에 전화를 건다.

혹시나 야반도주하는 사장이 생길까봐 안부나 회사상황을 묻는 척하며 일일이 확인한다.

이 지점장은 "전화를 잘 받으면 한숨을 돌리고 혹시라도 통화가 안되면 가슴이 덜컹한다"며 "담보를 걸어놨지만 조선소 사외 협력사에 돈을 떼일까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다"고 말했다.

조선소 사외협력사 상황이 심각하다.

조선불황 여파는 사외 협력사들부터 먼저 덮친다.

수주잔량이 줄어들면 조선소들은 선박블록, 데크 하우스(선원 거주구역이 있는 선박 상부 구조물) 등을 만드는 사외 협력사 물량을 우선 줄인다.

바깥에 맡겼던 물량을 조선소 안에서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불황의 칼날은 사외 협력사를 거쳐 사내 협력사, 마지막에는 원청에까지 들어온다.

'칼날'은 물량 감소나 단절은 물론 발주된 물량 대금 결제 지연, 단가 후려치기 등 다양하다.

조선소 안에 모여 있는 국내 조선 5사 800여 사내 협력사 대표들은 최근 연합회를 만들어 조선산업 구조조정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사외 협력사들은 조선소 밖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한 목소리를 내기 힘들다.

사내 협력사는 주로 사람을 모아서 선박건조 공정에 숙련공을 투입하는 형태로 회사를 운영한다.

조선소 설비를 이용하면 되기 때문에 기술력과 인력만 확보하면 회사 운영이 어느정도 가능하다.

그러나 사외 협력사는 조선소 밖에서 자기 돈을 들이거나 돈을 빌려 공장을 짓거나 임대해 조선소에 필요한 물량을 댄다.

또 사내 협력사들은 입주해 있는 조선소 1곳과 거래하지만 사외 협력업체들은 조선소 여러곳과 거래해 원청 눈치를 더 살필 수밖에 없다.

조선 불황 충격이 사내보다 사외 협력사에 더 큰 이유다.

고성군 동해면 봉암리 해안가에 있는 한 조선 기자재 공장은 지난 2월말 폐쇄됐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 선박·해양플랜트 기자재를 납품하던 이 회사는 물량이 줄면서 공장 가동을 시작한지 5년여만에 문을 닫았다.

한때 80명에 달하던 직원들을 뿔뿔이 흩어졌다.

사측은 아무나 들어가지 못하도록 녹슨 철자재와 지게차로 공장 입구를 막아놨다.

인적이 끊긴 공장바닥에는 어른 무릎 높이까지 자란 잡초만 무성했다.

공장 관계자는 "공장을 내놓았지만 사겠다는데가 없다"며 "조선불황이 끝날 기미가 보이면 모를까 당분간은 팔리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봉암리에 있는 또다른 사외 협력사는 불규칙적으로 나오는 선박블록 물량때문에 애를 태운다.

이 사외 협력사는 선박 블록을 만들어 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성동조선해양 등 조선사에 공급한다.

"옛날에는 1년치 블록 공급 계약을 했는데 요즘에는 확정 물량이 없어요.

그때그때 찔끔찔끔 나오는 물량을 받아서 공장을 돌립니다"
사외 협력사 운영을 10년 정도 한 그는 요즘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블록 물량이 줄면서 200여명이 넘던 직원은 최근 50명으로 급감했다.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에 선박 블록을 공급하는 가야중공업과 계열회사인 동일조선·삼화조선(이상 통영시) 3사도 물량감소 등의 이유로 쓰러졌다.

3개 회사는 지난해 6월 창원지법에 나란히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원은 지난해와 올해 3개 회사를 묶어 매각하려 했지만 인수자가 없어 실패했다.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의 또다른 사외 협력사인 장한(거제시) 역시 지난해 9월 창원지법에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대기업과 고정 거래선인 사내 협력사들이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아 원청업체 눈치를 무릅쓰고 최근 이익단체인 연합회를 만들었지만 사외협력사들은 그마저도 엄두를 못낸다.

작업 물량을 준 기업과 개별 관계 속에서 항상 '을'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기관과 관계도 개별적 대응을 할 수 있을 뿐 '조직적' 대응이나 입장 표명은 생각도 할 수 없다.

조선소 사외 협력사들이 한여름 창업 후 가장 가혹한 '시련의 계절'을 보내고 있다.

(고성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seam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