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해운업종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이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주요 대기업 집단의 계열사 중에서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속으로 곪아있는 곳이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데이터를 분석하는 재벌닷컴이 2015회계연도 기준 30대 그룹 계열사의 재무상황을 따져본 결과, 30대 대기업 그룹의 계열사 3곳 중 1곳꼴로 사실상 '부실기업' 판정을 받은 것이다.

재벌닷컴이 부실기업으로 분류한 곳은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이거나 연간 영업손실을 낸 실적부진 기업과 완전 자본잠식 상태를 포함해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재무위험 기업이다.

전문가들은 대기업 그룹들이 무한경쟁이 펼쳐지는 글로벌 사업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환부를 도려내는 선제적이고도 자율적인 구조 조정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대기업 집단 속에서 부실이 자라고 있는 것은 전체 자산 총액에서 1위인 삼성그룹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은 분석 대상이 된 전체 44개 계열사 중에서 17곳(38.6%)이 지난해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 중 삼성물산, 삼성바이오로직스, 삼성전기, 제일패션리테일 등 4곳은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이었다.

작년 한 해만을 따지면 영업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이자도 못 갚은 셈이다.

부채비율이 200%를 넘어 재무구조 개선이 시급한 계열사는 삼성중공업을 포함해 6개에 달했다.

이 중 삼성엔지니어링 등 2곳은 자본잠식 상태다.

현대자동차 그룹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전체 46개 계열사 중 영업손실을 낸 기업이 13개(28.3%), 부채비율 200% 초과 기업이 12개(26.1%)로 파악됐다.

LG그룹은 영업손실을 낸 실적 부진 계열사가 전체 66개 중 13개(19.7%)다.

대표 계열사인 LG전자가 이자보상배율 1 미만이었다.

신세계의 경우 34개 계열사 중 16곳(47.6%)이 적자 기업이었다.

CJ그룹과 효성그룹은 재무위험 상태에 빠진 계열사가 전체의 절반에 육박했다.

CJ 계열 60곳 중 30곳(50.0%)과 효성 43개 계열사 중 21곳(48.8%)의 부채비율이 200%를 웃돌아 재무구조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다.

자산총액 기준 15위인 부영그룹은 17개 계열사 중 적자기업이 13곳(76.5%), 재무위험 기업이 11곳(64.7%)이나 된다.

30대 대기업 그룹 중 2개 계열사를 둔 S-Oil만 적자를 내거나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곳이 없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을 이끄는 엔진 역할을 맡아온 대기업 그룹이 상당수 부실 계열사를 거느리게 된 것은 신성장 동력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AI) 등을 기반으로 한 '4차 산업혁명' 같은 세계 산업 구조의 급격한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는 등 새로운 성장산업 발굴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대기업 그룹이 수년간 구시대 업종을 백화점식으로 영위하면서 새로운 사업에 연구개발 투자를 하지 않았다"며 돈을 움켜쥐고 있거나 부동산 등 돈벌이가 쉬운 분야에만 투자해 경쟁력이 떨어지고 뒤처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성장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국내 경제와 산업을 되살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부실을 솎아내는 대기업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신사업 발굴이 시급한 상황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일부 총수들의 경영권 집착으로 대기업들이 구조조정 타이밍을 놓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며 "계열사나 자산을 일부 포기하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그룹 전체를 잃을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문제가 커진 그룹들을 보면 대체로 계열사 전체를 끌고 가려는 그룹 총수의 의지에 따라 우량 계열사가 부실 계열사를 무차별적으로 지원하는 미봉책으로 일관하다가 침몰 위기를 맞았다.

전 교수는 "부실기업 구조조정은 채권단 주도로 추진하고서 그래도 안 되면 회생 절차에 들어가도록 해 살릴 기업은 살리고 죽을 기업은 과감하게 도려내야 한다"면서 "이런 방식이 국민 출혈 규모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신사업 발굴에 성공하려면 그룹 총수의 위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김 교수는 "앞으론 총수의 역할이 '최고경영자(CEO)'형에서 '이사회 의장'형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영 판단은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의견 조정 역할을 총수가 하는 방식의 권한과 책임이 분화하지 않으면 대기업 그룹들도 도전 없이 위험만 회피하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악순환을 반복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 교수는 "지금과 같은 대기업 형태는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해선 맞지 않을 수 있다"며 창의성과 신기술 집약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유연한 형태의 소규모 기업 그룹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방안을 고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윤선희 유현민 기자 hyunmin623@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