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금융·기업 구조조정에 도움을 주는 일은 늘 논란거리였다. 위기 때마다 한은은 ‘특정 기업을 위해 돈을 함부로 찍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뒷짐을 졌다. 하지만 결국 정부의 압박, 정치적 여론에 떠밀려 한은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발권력을 동원해왔다.

한은 발권력 동원의 역사는 4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도 한은 내부에서 ‘독립성 쟁취’는 큰 화두였다. 하지만 번번이 정부의 압박에 무너졌다. 대표적 사례가 ‘12·12 사태’다. 1989년 주가가 폭락하자 재무부는 한은에 “한국 대한 국민 등 3대 투신사가 무제한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올릴 수 있도록 거액을 저리로 대출해주라”고 압박했다.

한은 독립성을 근거로 반발했던 조순 당시 한은 총재는 결국 2조9000억원을 대출해주는 ‘한은특별융자’에 서명했다.

발권력 동원에 민감한 한은이지만 수출입은행에는 막대한 자금을 출자해왔다. 정부는 한은의 수은 출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수은법까지 개정했다. 이렇게 해서 한은은 수은에 총 1조1650억원을 출자한 2대주주(13.1%)가 됐다. 수은이 설립된 1976년 200억원을 시작으로 2000년까지 모두 12차례 출자했지만 출자 때마다 논란이 됐다. 특히 2000년 마지막 출자(2000억원)는 금융통화위원회 내부에서도 끝내 전원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가결됐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도 한은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권력을 동원했다. 1997년에는 정부가 보증한 2조원 규모의 부실채권정리기금 채권을 직접 인수했고, 1998년엔 예금보험공사 채권 6조5000억원어치를 사들였다. 역시 정부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

한은은 대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발권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지난해 8월 산업은행에 3조4000억원을 대출해준 게 단적인 예다. 회사채 시장의 정상화라는 명분으로 정부는 한은이 신용보증기금에 출연하라고 요청했다. 출연이라는 방식이 부담스러웠던 한은이 고심 끝에 꺼낸 카드는 ‘대출’이었다.

한은은 산은에 돈을 빌려주고, 산은은 한은의 통안증권을 매입해 얻은 연 500억원의 수익을 신보에 대한 출연재원으로 사용한 것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의 압박이 있었지만 출연이라는 방식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대출해준 것”이라며 “지난 50년간 한은은 정부가 압박해야 마지못해 나서는 선수였지 ‘자칭 소방수’였던 적은 없다”고 설명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