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업계 "팔수 있는 건 다 매각"…외국 용선료 협상에 사활
조선 빅3 첨단기술 경쟁력 확보에 총력…일각에선 합병론 제기


글로벌 경기 침체가 길어지면서 국내 기간 산업인 해운과 조선업이 벼랑 끝에 서 있다.

사상 최악의 적자에 부도 위기까지 몰려 대규모 구조조정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해운업과 조선업은 우리 경제를 이끌어왔고 앞으로도 뒷받침해야 할 산업이기에 무리한 통폐합보다는 옥석을 잘 가려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들 업종은 시황에 따라 움직이므로 다시 호황이 왔을 때 경쟁국인 중국과 일본에 이들 산업을 모두 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그동안 이들 업종이 호황기에 방만 경영으로 부실을 자초한 면도 크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비핵심 사업을 과감히 배제하고 경쟁력 있는 부문에 집중하는 '군살 빼기'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 해운업 '팔 건 다 팔았다'…정부 지원 절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장기 불황으로 적자의 늪에서 허덕이는 해운업계는 최근 기업 구조조정 논란의 와중에 가장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한 업종이다.

해운업계는 지난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세계 선박 수출입 물동량이 급감하면서 장기 불황이 계속돼 왔다.

이후 8년여간 구조조정이 꾸준히 진행되면서 국내 대표 기업으로 꼽히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을 제외한 중·소형 선사들이 대폭 물갈이됐다.

이 과정에서 새로 뛰어든 중·소형 선사들은 배를 헐값에 사들여 원가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하며 수익을 내고 있지만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수년간 수천억 원대의 적자를 내며 위기를 맞았다.

최근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참석차 미국 워싱턴DC를 찾은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해운사 구조조정이 예정대로 되지 않으면 정부가 액션(행동)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도 대형 해운사들의 적자 규모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그동안 위기를 타개하고자 꾸준히 자구 노력을 펼쳐왔다.

한진해운은 한진그룹 계열사 지분을 전량 매각한 데 이어 벌크전용선, 국내외 터미널 지분 등을 팔고 대한항공으로부터 긴급 자금을 수혈받으면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겼다.

현대상선은 2011년 3천억원대의 영업손실을 시작으로 2012년 5천억원대, 2013년 3천억원대, 지난해 2천억원대의 적자를 내는 등 부채규모가 6조원대에 이르면서 액화천연가스(LNG) 운송사업과 컨테이너, 초대형원유운반선, 자사주 등을 매각했다.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이 장기 불황에 유달리 고전한 이유는 외환위기 당시 보유하던 배를 팔고 외국 선사들에게서 배를 빌려 쓰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호황기에 책정한 높은 용선료(선박 임대료) 계약 때문에 시세를 훌쩍 뛰어넘는 용선료를 지급하면서 불황에 따른 수익 감소와 더불어 이중고를 겪어왔다.

일단 현대상선은 용선료를 낮춰야 채권단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조건부 자율협약 상태여서 최근 진행 중인 외국 선사들과의 용선료 협상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현대상선은 이달까지 용선료 협상을 마치고 만기가 돌아오는 전체 공모 사채를 대상으로 오는 6월께 일괄 사채권자 집회를 열어 출자전환 등 채무조정을 진행할 방침이다.

한진해운은 한진그룹 지원으로 유동성 확보에 나서는 등 자구안을 마련해 채권단과 협의 중이며 지난 1월부터 진행한 재무진단 컨설팅이 끝나고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 주도로 경영개선 방안을 수립할 예정이다.

국내 해운사들이 세계 해운업계와 화주의 신뢰를 회복하고 영업에 나설 수 있도록 우리 정부와 금융권이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선주협회 조봉기 상무는 "세계 해운업계에서는 치킨게임이라고 할 만큼 경쟁이 치열한데 정부가 업계의 자구노력만 요구하면서 수년의 세월이 흘러 업계는 허약체질로 바뀌고 대외적인 여건은 악화됐다"면서 "정부와 금융권에서 한국 해운을 계속 지키려 한다는 신호를 세계 해운업계에 보여주고 지원한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 조선 빅3도 빨간불…세계 1위 위상 '흔들' = 주요 제조업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가 세계 시장을 독식해온 분야는 조선업이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국내 조선 대형 3사는 20여 년간 전 세계 조선 시장을 70%가량 점유해오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거제와 울산은 이들 조선소 직원들의 두둑한 주머니 덕분에 가장 살기 좋은 도시가 됐을 정도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들 3사가 해양플랜트 악재와 경영 부실로 수조원대 적자를 내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선박 수주는 끊기고 해양플랜트 악재는 지속되고 노사 갈등까지 이어지면서 조선업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이다.

이들 빅3는 지난해 총 8조5천억여원 규모의 사상 최대 적자를 냈다.

대우조선해양이 5조5천51억원, 현대중공업이 1조5천401억원, 삼성중공업이 1조5천19억원의 적자를 각각 기록했다.

조선 빅3가 동시에 조원대 적자를 낸 것은 지난해가 사상 처음이며 적자 규모 또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대규모 해양플랜트가 납기 지연 또는 계약 취소되는 일이 잇따르면서 지난해 빅3의 총 8조원대 적자 가운데 해양플랜트 손실만 7조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올해 들어서도 최악의 국면은 전혀 나아지지 않고 있다.

올해 1분기 조선 빅3의 수주는 단 3척에 불과했다.

과거 분기당 40~50척씩 수주가 몰려 거절할 정도였던 때와는 천양지차다.

선박을 수주해야 수만명의 일거리가 생기는 조선업체로서는 답답할 노릇인 셈이다.

조선 빅3의 맏형 격인 현대중공업은 지난달 중동 선주로부터 정유운반선(PC선) 2척을 수주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런 실적 또한 평년에 비하면 극히 저조한 편이다.

삼성중공업은 올해 현재 수주가 아예 없다.

채권단에서 4원여원을 지원받는 대우조선해양은 자회사인 루마니아 대우망갈리아조선소의 계약 건을 가져와 첫 수주로 돌리는 '극약 처방'까지 내놓았다.

대우조선은 최근 수에즈막스급 탱커 2척을 1억3천만달러에 수주했는데 이는 대우망갈리아조선소가 그리스 선사로부터 수주한 건이었다.

이 와중에 현대중공업 노조는 올해 임단협 요구안에서 매년 전년도 정년퇴직자를 포함한 퇴사자 수만큼 신규사원을 채용해 자동 충원하고 1년에 1회 이상 노조가 요구한 우수 조합원 100명 이상에게 해외 연수 기회를 줘야 한다는 내용을 담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업의 상황이 악화하자 일부에서는 조선 빅3를 통폐합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국내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조선업체가 3개나 있는 것은 과잉이라고 주장한다.

한진중공업 등 중소형 조선소까지 합치면 국내에만 20여개가 넘는 조선업체가 있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조선 업황이 좋았을 때 선박 부품을 만드는 업체까지 모두 조선소로 탈바꿈하는 바람에 현재는 조선업이 과잉 상태로 처치 곤란이 됐다"면서 "조선 빅3도 1~2개 정도로 줄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선업계 내부에서는 3~4년만 버티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어차피 공급 과잉으로 벌어진 '치킨 게임'이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보다 오래 버티면 결국 조선 빅3의 세계 독식 구조가 다시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조선업계 관계자는 "조선 빅3는 잘 살려서 일본이 어려워지는 순간까지 버텨야 한다"면서 "또한 조선 업종은 대부분의 선박 제작에서 중국이 한국을 따라잡았기 때문에 첨단 크루즈선 기술 개발 등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추광호 전국경제인연합회 산업본부장은 "기본적으로 공급 과잉은 분명하며 우리나라 조선업이 세계적으로 상당한 경쟁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면서 "구조 조정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옥석을 잘 가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충분히 기술 경쟁력 갖고 있는데 일시적 글로벌 공급과잉으로 위기를 겪는 기업이 있고 경쟁력이 없어 도태돼야 하는 기업이 있는데 옥석을 분명히 가려야 한다"면서 "일시적 위기를 넘기려는 기업에게는 사업 재편이나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지게 제도적 뒷받침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박인영 김연정 기자 president21@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