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작년에 구조조정 ‘타깃’으로 정한 조선, 해운, 건설, 철강, 석유화학 등 전통 주력 산업은 최근 수년간 ‘구조조정 무풍지대’였다. 이 중 상당수에 대해선 2010년 이후 “중국발(發) 공급과잉 여파로 심각한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잇따랐지만, 주요 기업들은 ‘몸집 줄이기’를 거부했다. “실적이 나쁘지 않거나 둔화 속도가 빠르지 않은데 구조조정은 시기상조”라는 게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는 작년 사상 최악의 실적으로 나타났다. 조선 ‘빅3’인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의 작년 1~3분기 누적 영업손실은 총 7조9319억원에 달했다. 철강업종 대표기업인 포스코는 작년에 1000억원대 순손실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 구조조정 지지부진한 한국] 은행 돈으로 연명하는 조선사…공급과잉에도 설비 늘린 철강사
◆더딘 구조조정

산업계에서 2011년 직후 구조조정 1순위로 꼽힌 업종은 조선업이다. 이 무렵 글로벌 조선산업이 침체하기 시작한 가운데 산업의 주도권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2011년 이후 한국 조선업계는 중국보다도 구조조정 속도가 느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의 조선·해운 분석기관 클락슨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 조선사들의 선박 생산량은 2011년 1620만CGT(표준환산톤수)에서 작년 1270만CGT로 약 21.6% 감소했다. 같은 기간 중국 조선사들의 생산량은 2090만CGT에서 1290만CGT로 38.2% 줄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조선업계에서는 수년치 작업 물량을 쌓아놓기 때문에 생산량이 곧 생산설비 규모와 비슷하다”며 “한국의 생산 감소폭이 중국보다 작다는 건 그만큼 구조조정을 더디게 진행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2010년 이후 부실 조선사가 받은 금융권 지원은 12조원이 넘는다.

철강업계는 중국의 저가 공세에 오히려 대형 설비투자로 맞서려다 공급과잉의 늪에 함께 빠져버렸다. 이에 따라 상당수 영세기업이 줄줄이 쓰러지고 있다. 작년 11월 이후 철강회사 277개의 공장이 몰려 있는 포항철강관리공단에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 공장이 속출했다.

석유화학업계도 구조조정 속도가 느리기는 마찬가지다. 윤상직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작년 9월 “석유화학업종을 그냥 두면 공멸한다”고 경고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정부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테레프탈산(TPA) 및 카프로락탐 생산 기업들과 물밑에서 구조조정을 논의했지만, “자율에 맡겨달라”는 기업들의 반대에 부딪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버티면 산다” 분위기 팽배

“한국에서 기업 구조조정이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은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도 한몫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고용창출 효과가 큰 이들 업종에 ‘메스’를 들이댔다가 ‘후폭풍’에 시달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 대형 조선사 관계자는 “2010년 이후 중·대형 조선사 중 절반 이상이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아직 문을 닫은 곳은 없다”며 “아무리 경영에 실패해도 버티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살아남은 부실기업들로 인해 공급과잉 현상이 심해지고 결국 멀쩡한 조선사까지 위태롭게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범용제품 분야에서 중국 기업에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는 석유화학업계는 “아직 사정이 나쁘지 않다”는 이유로 구조조정에 소극적이다.

◆구조조정 늦추면 더 큰 위기 초래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선진국은 기업들이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을 진행해 원가 및 품질경쟁력을 높였고, 중국은 정부가 주도적으로 구조조정을 시행하고 있다”며 “한국만 구조조정에 손을 놓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업종에서 이란 특수 등을 기대하며 ‘구조조정을 늦추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지금이라도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으면 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업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철길 SK이노베이션 부회장은 “지금 정유 및 석유화학업계는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 잠깐 따듯해지는 ‘알래스카의 여름’과 같은 시기”라며 “지금이 사업 구조를 바꿀 마지막 골든 타임”이라고 강조했다.

도병욱/송종현 기자 do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