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신용사회] "법원 강제 회생 절차 들어가기 전 민간부문 워크아웃 먼저 밟게 해야"
호프집을 운영하던 한모 씨(40)는 가게를 확장하기 위해 지난해 초 은행과 제2금융권에서 2억여원을 대출받았다. 돈이 모자라 대부업체와 지인에게서 1억원을 추가로 빌렸다. ‘잘못되면 개인회생을 신청하면 된다’는 대부업체의 말에 용기를 얻었다. 한 달 이자만 250만원에 달했다.

무리한 대출은 화(禍)를 불렀다.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자 결국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그러나 웬걸. 법원은 ‘불인가 결정’을 내렸다. “갚기 벅차다는 점을 알면서도 갑자기 무리하게 대출받았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한씨에게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들이 기한이익상실(만기 전 대출금 회수) 처리를 하고 모든 대출을 한 번에 갚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가게마저 팔아야 했다.

◆사적 채무조정 후 법원 가는 게 더 유리

[흔들리는 신용사회] "법원 강제 회생 절차 들어가기 전 민간부문 워크아웃 먼저 밟게 해야"
개인회생을 악용할 경우 닥칠 수 있는 대표적 사례다. 법원의 개인회생 인가율은 71%에 이른다. 4건 중 3건은 인가를 받는다. 거절되는 경우는 고작 1건이다. 인가만 받으면 빚의 절반 이상을 탕감받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브로커나 법무사, 대부업체 등은 공공연하게 ‘개인회생을 받으면 된다’고 부추긴다.

이는 어디까지나 잘됐을 때 얘기다. 한씨처럼 자칫 큰 봉변을 당할 수 있다. 자신의 조건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법원부터 찾으면 곤란하다는 것이 금융계의 지적이다. 대신 개별 금융사 또는 민간 채무조정기구인 신용회복위원회를 먼저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흔들리는 신용사회] "법원 강제 회생 절차 들어가기 전 민간부문 워크아웃 먼저 밟게 해야"
은행들은 자율적으로 사전 채무조정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만기 때 연체가 우려되거나 연체 3개월 미만인 일시상환방식 신용대출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 최장 10년간 연 5.2~13%의 금리로 분할 상환토록 하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개별 은행과 채무 조정을 하기는 쉽지 않다. 이 경우엔 신용회복위원회를 찾는 것이 도움이 된다. 신용회복위원회는 금융사들과 협약을 맺고 개인워크아웃이라는 제도를 통해 빚을 깎아준다. 단점은 협약에 가입하지 않은 금융사에 진 빚은 탕감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개인워크아웃을 받아도 남은 빚이 많을 경우에만 신용회복위원회는 채무자를 법원으로 안내한다.

신용회복위원회에서 먼저 채무 변제 의지를 밝히고, 자구 노력을 한 경우 법원에서 회생 인가를 받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신용회복위원회는 연체 초기 단계(90일 미만)에 있는 사람들이 과다 채무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빚을 일부 탕감해주는 프리워크아웃이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민간 채무조정 반드시 먼저 받게 해야

주요 국가들은 법원의 회생 절차 전 민간 채무조정프로그램을 반드시 먼저 거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국은 아니다. 이에 전문가들은 법원의 공적 채무조정 절차 전에 꼭 사적 채무조정 절차를 거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강호석 한국은행 과장은 “개인워크아웃을 통해 채무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경우에도 법원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며 “사적 채무조정을 먼저 받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환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적 구제제도로의 쏠림은 당사자 간 자율적으로 채무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한다”며 “법원은 개인회생 인가 심사 때 채무자들이 사적 조정단계에서 변제를 위해 성실하게 자구 노력을 했는지 등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적 조정제도 활성화를 위해 신용회복위원회 채무조정 대상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대익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대부업체 등을 중심으로 협약 금융사를 늘려야 한다”며 “대부 광고 때 협약 가입 여부를 의무적으로 표시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