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재계 人事는 2末3初에
“저희 새 대표이사가 협력업체와 간담회를 갖고 상생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기삿거리 되겠죠?”

“예. 좋은 아이템이네요. 그런데 새 대표이사는 언제 취임했습니까?”

“작년 12월에 취임했습니다.”

“그럼 작년 12월에 주주총회를 열었겠네요.”

“아뇨. 주총은 이번 3월에 엽니다.”

“주총도 안 열었는데 어떻게 이사 선임이 되고 대표이사를 맡았습니까?”

“…”

기자가 최근 한 대기업 홍보담당 임원과 나눈 대화다. 의욕에 넘쳐 활동을 시작한 이 기업의 대표이사나 이를 알리려는 홍보 임원을 깎아내릴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주총도 거치지 않은 채 대표이사(또는 등기이사) 역할을 하는 게 바람직한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기업과 최고경영자(CEO)가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주총없는 CEO 선임은 법 위반

상법 382조에는 ‘이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한다’고 규정돼 있다. 상법은 또 389조에 ‘회사는 이사회 결의로 회사를 대표할 이사를 선정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관으로 주주총회에서 이를 선정할 것을 정할 수 있다’고 정해놓고 있다. 상법은 288조부터 542조까지 주식회사에 대해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 회사는 주식회사이며, 이사는 주식회사의 이사를 말한다. 상법은 363조에선 주식회사가 주주총회를 소집하기 위해선 2주 전에 서면으로 통지를 발송하거나 각 주주의 동의를 받아 전자문서로 통지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요약하면 대표이사 선임을 위해선 2주 전 주총 소집→주총→이사회(경우에 따라선 생략)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하지만 국내 상당수 대기업 임원 인사는 상법을 무시하면서 이뤄져 왔다. 대개 11월이나 12월에 그룹 단위로 사장단 인사를 한다. 정기인사다. 퇴진하는 경영자는 바로 짐을 싼다. 대표이사로 승진하거나 이동하는 경영자는 늦어도 다음날까지 자리를 옮긴다. 새 CEO는 곧바로 임원회의를 소집하고 외부인사를 만나는 등 대내외 활동을 시작한다.

관행 바꾸면 고칠수 있는 폐단

이 과정에서 임시 주총이 열렸다는 얘기는 없다. 당연히 상법 위반이다. 물론 새해 사업계획을 새 경영진에 짜도록 하기 위해 이런 관행을 유지해 온 것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역시 법을 어기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다.

상법을 준수하면서 주식회사가 인사를 하는 방법은 없을까. 두 가지가 있다. 11월이나 12월에 CEO 인사를 하고 싶다면 임시 주총을 열면 된다. 금융권은 이미 이렇게 하고 있다. KB금융지주는 윤종규 신임 대표이사 회장을 선임하기 위해 지난해 11월21일 임시 주총을 소집했으며 이날 주총 직후 이사회를 열었다.

정기 주총을 앞두고 임시 주총을 여는 것이 중복이며 비용 낭비라고 판단되면 정기 주총을 얼마 앞두고 인사를 내는 게 또 다른 방법이다. 12월 결산법인의 경우 대개 정기 주총이 3월에 열리기 때문에 2월 말이나 3월 초에 내정 인사를 내면 된다. 집행 임원에 대한 인사는 주총 후에 하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고치기 쉬운 폐단 중 하나일 뿐이다. 그간의 관행만 바꾸면 위법 시비는 사라질 것이다.

박준동 생활경제부 차장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