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박한 당정회의 >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부터)과 새누리당의 이완구 원내대표, 주호영 정책위원회 의장이 21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회의에서 연말정산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 긴박한 당정회의 >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오른쪽부터)과 새누리당의 이완구 원내대표, 주호영 정책위원회 의장이 21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회의에서 연말정산 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또 세금이다. 2013년 가을 세법 개정 당시 ‘거위털’ 논란, 2014년 초 전세보증금 과세 논란에 이어 이번 연말정산 사태까지 박근혜 정부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 ‘세금 대란’이 벌어졌다. 왜 이런 소모적인 일이 반복될까. ‘3무(無)’ 때문이다. 세정(稅政)을 설계하는 정부가 생각이 짧아 납세자 정서에 둔감했고 증세에 대해 솔직하지도 못했다. 정치권은 유권자의 인기에 영합해 원칙 없이 입법권만 휘둘렀다. 이런 3무는 공제 혜택 소급 적용이라는 세법 역사상 전례 없는 소동까지 낳고 있다.

올해 연말정산 사태는 이미 2013년 세법 개정 때부터 예고됐다. 당시 정부는 연봉 3450만원 이상 근로소득자의 세금 부담을 높이는 세법 개정안을 발표한 뒤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고 근로소득공제율을 조정하면서 연봉 3450만원 이상인 중산층 근로소득자의 세금 부담을 늘리는 게 핵심이었다.

조원동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거위털을 뽑는 것과 같이 아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며 근로자에게 크게 부담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오히려 반발을 부추겼다. 결국 정부는 부담이 늘어나는 기준을 연봉 5500만원으로 조정, 세법 개정안을 수정했다.

정부는 급한 불을 끄자는 식으로 일단 기준을 높여 잡았고 정치권은 덜컥 여기에 동의했다. 어느 쪽도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국민의 생활 수준에 비춰 적정한 것인지 진지한 고려는 하지 않았다. 정부는 5500만원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중위 소득의 150%에 해당되는 소득이라며 밀어붙였다. 정치권은 그냥 수용했다. 당시엔 넘어간 것 같았지만 여론은 2014년 귀속 소득분 연말정산을 앞두고 다시 폭발했다. ‘연봉 5500만원 이하 근로자는 세금 부담이 늘지 않는다’는 정부 약속, 청와대와 정치권이 공언했던 ‘증세 없는 복지’ 어느 것도 납세자들이 체감하는 현실과는 달랐다.
'연말정산 대란' 부른 3無
정교한 설계없이 발표한 뒤 땜질처방 급급…누더기 된 연말정산

"중산층 세금 늘지 않아"…정부, 무책임한 홍보 남발
공제항목도 갈수록 복잡

정치권, 감시·견제 실종…대안 마련없이 정부 탓만


[1] 정치권, 무원칙한 포퓰리즘

2013년 세법 개정안이 제출되자 국회는 245 대 6이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시켰다. 세법 개정안은 정부가 만들었지만 이를 통과시킨 것은 국회였다. 견제와 감시를 해야 할 국회의 임무를 하지 않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뒤늦게 “죄송하다”고 했지만 사태는 일파만파 확대된 뒤였다.

야당은 여당과 합의를 본 뒤 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래 놓고는 이제 와 ‘세금폭탄’ 운운하며 정부와 여당에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여야 정치권은 2012년 총선과 대선 때부터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복지 확대 공약을 내놨다. 이를 뒷받침할 재원 마련에 대해선 어느 쪽도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 여론이 잠잠할 때는 생각 없이 법안을 통과시키고, 문제가 되면 정부를 탓하는 무원칙한 포퓰리즘 입법 행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야당은 부자증세를 한다며 소득세 최고세율(38%) 구간을 2012년 말 세법개정 때 3억원에서 1억5000만원으로 낮췄다. 여당은 여기에다 월세소득공제 확대 등을 추가했다. 정치권의 생색내기에 연말정산 제도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누더기가 돼갔다.

국세청이 최근 발간한 연말정산 안내자료에 따르면 올해 연말정산에서 근로소득자들이 참고해야 할 공제 항목 및 예외조항 등은 무려 200개에 달한다. 세무업계 관계자는 “한국의 연말정산 제도는 매년 달라져 세무사도 모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라며 “원칙 없이 그때그때 여론에 따라 세법을 바꾸다보니 갈수록 복잡해지고 신고 과정에서 납세자의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2] 무사안일한 대응

정부가 국민이 느끼는 현실과 얼마나 괴리돼 있는지는 2013년 세법 개정안 당시 거위털 논란에서 잘 드러났다.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도 부족한 때에 자극적인 비유로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연봉 5500만원 이하 소득자는 세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아예 단정적으로 발표했다.

정부는 통계상의 수치만 맹신한 채 국민의 다양한 세 부담 사례를 외면했다. 공제 조건에 따라 부담이 늘어나는 납세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다. 옥동석 한국조세재정연구원장은 “정부는 5500만원 이하는 세금 부담이 줄어든다고 했지만 일부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정부가 이런 세세한 부분을 헤아리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미시적인 예외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않아 납세자의 분노를 더 키웠다. 기획재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기본적인 정책과 상충되는 세법을 만드는 악수까지 뒀다. 2013년 세법 개정안에서 다자녀소득공제와 출산소득공제 혜택을 폐지한 게 대표적인 예다. 청와대는 저출산 위기를 호소하며 출산장려책을 펴고 있는데 기재부는 다자녀가구에 부담을 가중하는 세법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자충수가 월급쟁이들의 분노를 불렀다.

[3] 솔직하지 못했던 정부

지난해 복지 예산이 처음으로 100조원을 돌파했다. 올해는 복지 예산이 전체 예산의 30%를 넘어섰다. 반면 복지를 시행할 재정은 누수가 심화되고 있다. 2012년 국세 수입이 당초 세입 예산을 2조8000억원 밑돌았다. 2013년에는 8조5000억원의 세수가 펑크났다. 지난해에는 세입 예산에 비해 국세 수입 부족액이 11조1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올해도 세수가 3조원 이상 부족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저물가가 이어지고 글로벌 경기침체가 지속되면 수출 기업들의 실적 부진 등으로 올해 세수도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복지 확대, 아니 현재 수준의 복지정책만 유지하려고 해도 증세는 피할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증세가 싫다면 복지 혜택을 줄일 수밖에 없다. 국민은 ‘복지 축소도, 증세도 싫은’ 모순적인 상황이라고 정부와 정치권은 파악했다.

이런 모순적인 국민의 요구를 맞추기 위해 한쪽(정부)에서는 증세가 아니라고 하면서 꼼수 증세(세액공제 전환, 한계세율 인상, 담뱃값 인상) 정책을 폈다. 다른 한쪽(정치권)에서는 복지를 확대하라고 하면서 증세 정책을 펴면 안 된다는 요구를 하고 있다. 복지 수요와 예산이 급증하는 추세지만 어느 쪽도 솔직하게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

김유찬 홍익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금의 복지 수준을 감당하기 위해선 하루빨리 증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국민도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일정 부분 감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임원기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