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소설가이자 사회평론가 복거일 선생(68). 그는 한국 기업의 ‘현재’를 비관하지 않았다. “우리 기업이 처한 문화적·지정학적 조건은 변한 게 없고 위기는 늘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미래’에 대한 섣부른 낙관도 내놓지 않았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 시스템, 과도한 규제로 대변되는 관(官) 주도 경제를 혁파하지 않으면 위기는 계속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 기업의 미래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백발의 노(老) 작가는 두 시간 동안 고대 그리스문명 이후 동서고금의 역사를 훑었다. 그가 제시한 실마리는 파편적이다. ‘불확실성’, ‘기회’, ‘시장’, ‘기업가’…. 그는 “지금 한국의 대기업은 관료주의에 빠져 있고, 중소·벤처기업은 패기가 없다”고 진단한 뒤 “불확실성에서 기회를 찾아내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기업가 정신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업의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지금 위기는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봐야 합니다. 개인과 기업의 활동을 한껏 보장하고 정부는 부족한 걸 떠받쳐주는 게 시장경제의 작동원리예요. 그런데 정부가 규제를 통해 시장을 주도하려 하니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요.”

▷국내 기업이 성장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기본적인 건 바뀌지 않았어요. ‘넛크래커’ 얘기만 해도 나온 지 30년이 됐어요. 당장 일본에 치이고 중국에 추격당해 (호두처럼) 깨질 것 같았지만 우리 기업들은 잘 버텨왔지 않습니까. 지금 위기는 기업 차원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문화적·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해요. 근본 조건이 바뀌지 않으면 위기는 형태를 바꿔서 계속 올 겁니다.”

▷어떤 조건이 바뀌어야 합니까.

“규제 완화를 예로 들어보죠. 이건 이념의 문제예요. 기업규제는 국회에서 풀어야 합니다. 국회는 표심을 따르는 데, 여론은 기업에 비우호적이에요. 어떻게 규제완화가 되겠습니까. 기업들도 크게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길고 큰 안목으로 협력사, 중소기업, 소비자, 시민단체 등 큰 생태계에서 살아간다는 걸 알아야 하는데 근시안적으로만 바라보죠. 대기업이 벤처기업 아이디어를 가로채는 일이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구조적 문제가 풀리길 마냥 기다릴 수는 없지 않나요.

“규제가 심하고 노동문제가 어렵다면 기업들이 밖으로 나가면 됩니다. 삼성전자도 아예 외국 법인이 되는 게 낫다고 봐요. 우리 국민도 그렇게 (기업을) 구박하면서 밖으로 나간다고 하면 ‘애국심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중국 기업의 추격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 중국이 강하면 강한 대로 거기에 적응해야죠. 그 답을 찾는 건 기업가의 몫입니다. 중국 기업이 강해질수록 중국인들의 소득수준이 높아질 것이고, 돈을 어디에든 쓰려고 할 겁니다. 새 시장이 열리는 거죠. 그런 기회를 기업이 포착해내야 합니다.”

▷제조업은 당장 큰 타격을 받지 않을까요.

“중국 제조업이 성장한다면 우리는 제조업이 아닌 다른 걸 하면 되지 않나요. 아모레퍼시픽 같은 소비재기업이 중국 시장에서 고속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조업을 우리가 모두 할 수는 없어요. 비교우위를 따져야죠.”

▷기업가 정신이 쇠락하고 있다는 경고음도 상당합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새 사업을 시작할 때 ‘중동에서 건설사업도 해봤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느냐’고 말했어요. 참 멋진 말 아닙니까. 지금은 그런 패기가 없어요. 대기업은 관료주의에 빠져 있고 중소·벤처기업은 작다는 이유로….”

▷관료주의가 왜 만연해 있다고 봅니까.

“관료주의는 자기 혹은 소속 부서를 전체 조직보다 우선시하는 겁니다. 이건 물리법칙이에요. 구(球)의 표면적보다 부피가 곱절 빨리 늘 듯이 기업 규모가 작을 때는 나타나지 않다가 규모가 커질수록 필연적으로 나타납니다. ”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뇌가 쭈글쭈글한 건 표면적을 늘려 산소를 최대한 많이 공급받기 위해서예요. 기업도 관료주의를 없애려면 표면적을 늘려 외부 영역을 내부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조직이 크면 무조건 쪼개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아예 회사를 팔아야죠.”

▷기업들의 자발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얘기입니까.

“IBM은 회사의 상징과 같은 PC사업까지 중국기업에 팔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 기업들은 ‘남들이 하는 건 나도 한다’는 식이었어요. 최근 삼성그룹과 한화그룹의 빅딜은 그런 의미에서 무척 신선했습니다.”

▷10년 뒤 한국 기업들 상황을 어떻게 전망합니까.

“예측하기 참 힘듭니다. 변화에 적응하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이 있을 겁니다. 적응하지 못하는 기업은 죽고 말겠죠.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가 그렇게 나타나는 거죠. 문제는 정부가 자꾸 규제를 통해 (창조적 파괴를) 막고 있다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혁신기업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휴대폰을 봅시다. 지금까지 삼성은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노키아를 추격했는데, 갑자기 선두(노키아)가 멈춰서는 바람에 삼성이 앞서 버렸어요. 줄곧 남 뒤를 따라오다 자기가 맨 앞에 서다 보니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 놓인 겁니다. 선발주자로서 새로운 걸 보여주지 못하는 거죠. 이건 우리의 민도(民度), 즉 문화적 수준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기업들의 꿈이 작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중국 알리바바의 마윈 회장을 보세요. 그 폐쇄적인 사회에서 뉴욕증시 상장을 꿈꿔 이루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글로벌 기업이 되겠다’는 자세로 접근한 결과죠. 지금 우리에게 마윈 같은 기업인이 있습니까.”

▷‘변경’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많이 했습니다.

“남들이 가보지 않은 새로운 영역이 ‘변경’입니다. 삼성을 예로 들어보죠. 바이오시밀러를 신수종사업으로 정했는데, 제약은 남들이 이미 구축해놓은 영역입니다. 복제약을 대량 생산해서 뭘 얻을 수 있을까요. 삼성이 제약·바이오에 관심 있다면 ‘인공 광합성’을 목표로 해보라고 조언해 주고 싶습니다. 미래 인류의 생태계를 바꿀 혁명적인 일에 도전해보는 것, 이런 게 진짜 ‘변경’ 아닐까요.”

"망할 기업 망해야 새 기업 나와…'창조적 파괴' 필요한 때"

2010년부터 시작된 노키아의 몰락은 핀란드 경제를 휘청거리게 했다. 한때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4%, 수출의 20%를 감당했던 ‘공룡’이 무너진 충격파는 크고 깊었다. 핀란드의 2012년 휴대폰 수출액은 2007년 대비 33.5% 감소했다. 노키아는 직원 1만명 감원 등 구조조정을 했지만 결국 작년 마이크로소프트(MS)에 팔렸다.

그러나 폐허에서 ‘새싹’은 돋아났다. 노키아를 떠난 수많은 젊은 인재가 수천 개의 벤처를 만들어냈다. 노키아 본사가 있던 에스포 시(市)에는 작년 한 해 1000여개의 벤처가 생겨났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정보기술(IT)·게임업체도 속속 나왔다. 모바일 게임 ‘앵그리버드’를 만든 로비오, ‘클래시 오브 클랜’ 게임을 개발한 슈퍼셀, 보급형 스마트폰 제조업체 욜라 등이 그런 새싹들이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이를 두고 “대기업이 쓰러질 때 기업가 정신이 살아난다”고 했다.

복거일 선생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이 망해야 ‘새싹’이 돋아난다”고 강조했다. 낡은 것이 파괴돼야만 새로운 것이 나온다는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메커니즘이 작동할 것이란 설명이다.

한국에선 어떨까. 그는 “죽은 삭정이가 하늘을 가려 새싹이 나올 수 없는 구조”라고 꼬집었다. 이미 퇴출됐어야 할 기업이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면서, 새로운 기업의 등장을 막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내 기업 가운데 이른바 ‘좀비기업’(한 해 벌어들인 이익으로 이자도 못 갚는데 금융지원으로 연명하는 기업) 비중은 2010년 13%에서 작년 15.6%로 늘었다. 낡은 것을 버리는 데 대한 두려움은 혁신의 장애물이다.

복거일 사회평론가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대전 우송고 졸업 △서울대 상학과 졸업 △1987년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제17회 동리문학상 수상 △제25회 시장경제대상 공로상 수상 △문화미래포럼 대표 △소설가·시인·사회평론가로 활동 중

이태명 기자 chihir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