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171개 민간 벤처캐피털 주도로 혁신형 벤처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유망 벤처기업이 많아지면서 글로벌 IT기업들도 연구개발(R&D) 기지를 이곳에 둔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있는 구글캠퍼스. 한경DB
이스라엘은 171개 민간 벤처캐피털 주도로 혁신형 벤처기업을 지원하고 있다. 유망 벤처기업이 많아지면서 글로벌 IT기업들도 연구개발(R&D) 기지를 이곳에 둔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에 있는 구글캠퍼스. 한경DB
이스라엘 텔아비브 인근의 소도시 라마트 간(Ramat Gan). 작년 이곳에선 두 명의 ‘벤처 갑부’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스마트폰용 앱 개발업체 오나보(Onavo)의 공동 창업주 가이 로센과 로이 타이거. 두 사람은 2010년 스마트폰 데이터 사용량을 측정하는 앱을 개발하는 오나보를 세웠다. 직원 수 40명의 벤처기업이다. 이 조그만 이스라엘 회사를 미국 페이스북은 작년 10월 2억달러에 인수했다. 회사 매각으로 로센과 타이거는 5000만달러를 손에 쥐었다.

‘3년생’ 오나보를 페이스북이 군침을 흘릴 만한 벤처로 키운 건 ‘정부’가 아니었다. 오나보는 정부 정책자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자금 지원은 민간 벤처캐피털이 맡았다. 설립 초기 ‘마그마 벤처 파트너스’(이하 마그마) 등 4개의 벤처캐피털이 1300만달러의 ‘종잣돈’을 오나보의 성장가치만 보고 투자했다. 오나보만 그런 게 아니다. 이스라엘의 대다수 벤처기업은 정부 자금을 받지 않는다. 이원재 요즈마그룹 한국지사장은 “이스라엘에선 기업 자금은 정부 종잣돈이 아닌 민간 벤처캐피털을 통해 조달한다”고 설명했다.

정책자금이 없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창업국가’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로 꼽힌다. 정보기술(IT)·전자, 항공·우주, 제약, 농업, 물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망 벤처기업이 즐비하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이스라엘 기업 수는 반도체 회사 DSP, 바이오 회사 플루리스템테라픽스 등 64개사에 달한다. 미국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다.

‘창업강국’ 이스라엘의 힘은 역설적이게도 ‘정부가 나서지 않았다’는 데서 나온다. 민간자본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될성부른 ‘떡잎’을 찾아 지원한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스라엘도 정부 주도로 정책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정부 주도 방식은 곧 한계에 직면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벤처 생태계에 보조를 맞추기에는 자금 규모나 노하우가 부족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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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작한 게 민·관 합작의 벤처캐피털 육성 프로젝트였다. 정부와 민간자본이 공동 출자해 투자펀드를 만들어 벤처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1992년 ‘인발(INBAL)’이란 민·관 합작펀드를 처음 만들었으나 1년 만에 실패했다. 이 경험을 살려 이듬해인 1993년 요즈마펀드를 만들었다. 펀드조성 규모는 2억6300만달러로, 이스라엘 정부가 40%, 해외 벤처캐피털이 60%를 출자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자금을 대는 역할만 하고 투자기업 발굴 등 세부 지원은 민간 벤처캐피털이 전담했다. 이 펀드를 모태로 10개의 자회사 펀드도 조성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요즈마펀드는 1993년부터 5년간 217개 이스라엘 벤처기업에 투자했다. 기업공개(IPO), 매각을 통한 투자금 회수율은 56%에 달했다. 이 지사장은 “정부는 기업에 직접 투자하기보다 ‘마중물’ 역할만 하고, 경험 많은 민간 투자사를 적극 활용한 게 요즈마펀드의 성공 비결”이라고 설명했다.

‘제2 요즈마’ 171개가 키운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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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정부는 요즈마펀드가 가시적인 성과를 내자 1997년 요즈마펀드를 아예 민영화했다. 정부 출자금 전액을 뺐다. 마중물을 붓는 역할도 그만둔 것이다. 대신 경제부 산하 수석과학관실(OCS)에 박사급 기술가치 평가사, 해외 벤처캐피털 투자심사역 출신 등 100여명의 전문인력을 배치해 해외 투자자본을 유치하는 일에 집중했다.

정부가 빠져나간 자리엔 민간 벤처캐피털이 대거 몰려들었다. 요즈마펀드의 성공이 가져온 효과였다. 1990년 단 2곳이던 벤처캐피털은 작년 말 171개로 급증했다. 이들 벤처캐피털이 지원하는 이스라엘의 혁신형 벤처기업만 5000여개가 넘는다. 투자 규모는 연간 20억달러가량이다.

벤처캐피털이 키운 스타 기업도 많다. ‘마그마’가 투자한 내비게이션 앱 개발업체 웨이즈는 작년 6월 구글에 13억달러(약 1조3000억원)에 팔렸다. 마그마 관계자는 “지금까지 23개 이스라엘 스타트업(창업 초기 기업)에 3억달러 이상 투자했고, 7개 기업을 해외 기업에 매각하거나 상장시켰다”고 설명했다. 최근 미국 반도체 제조업체 브로드컴과 퀄컴이 각각 인수한 이스라엘 벤처기업 프로비전트, 디자인아트도 벤처캐피털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다.

정부 정책자금 없이 민간 벤처캐피털을 활용한 이스라엘식 모델이 거둔 성과는 놀라울 정도다. 이스라엘의 IT산업(서비스, 소프트웨어, 하드웨어 업종 포함) 규모는 2010년 52억8700만달러에서 작년 66억9500만달러로 급증했다. 이스라엘 연간 수출액의 50%가 혁신형 첨단기업들에서 나온다.

고영하 엔젤투자협회 회장은 “정부 주도로 정책자금을 지원해 온 한국은 당장 민간영역에 기업 자금 조달을 맡길 수는 없겠지만, 1990년대 초반 이스라엘처럼 정부는 마중물 역할을 하고 선별 작업 등은 민간영역에 맡기는 쪽으로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 특별취재팀

이태명 팀장, 정인설(산업부) 전설리(IT과학부) 윤정현(증권부) 박신영(금융부) 전예진(정치부) 김주완(경제부) 임현우(생활경제부) 조미현(중소기업부) 양병훈(지식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