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법무팀은 '만능 해결사'
모 대기업의 법무팀장인 A씨는 올초 그룹 회장의 재산 관리 업무를 새로 맡았다. 재무팀장이 하던 일까지 떠맡게 된 건 대기업 오너와 관련된 규제가 늘어난 탓이다.

지난해부터 일감 몰아주기 과세가 시작된 데 이어 법무부가 오너의 권한을 제한하는 쪽으로 상법 개정을 추진하는 게 단적인 예다. 반기업정서가 확산되고 기업인들에게만 유독 엄격한 잣대가 적용되면서 각종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임 여부를 꼼꼼히 따져봐야 할 필요성도 커졌다. 10대 그룹의 한 임원은 “중요한 경영 현안뿐 아니라 오너 일가 문제에선 무엇보다 보안이 중요해 외부 로펌에 의뢰하기 힘들다”며 “결국 곳간지기를 포함해 주요 역할을 그룹 법무팀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법무팀의 역할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신사업을 추진하거나 해외에 진출할 때 사후에 법률관계를 따져보는 역할에 국한됐지만 최근 들어 사업전략 수립 단계부터 의사결정 과정까지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곳곳에서 특허 소송 같은 각종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대표적인 곳이 삼성이다. 삼성은 2012년부터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뽑아 법무가 아닌 기획과 컨설팅, 마케팅 같은 일반 업무를 맡기고 있다. LG화학은 지난해 전사적 특허경영시스템을 구축해 사업 초기 단계부터 변호사 등을 참여시키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국내 로스쿨도 미국 로스쿨 교육 제도를 본떠 기업의 사내 변호사 양성을 정규 교육 과정으로 도입하고 있다.

법무팀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법무팀장 출신이 최고경영자(CEO)로 발탁되는 사례도 있다. GS그룹 법무 업무를 총괄해온 임병용 사장은 GS건설 최고재무책임자(CFO)를 거쳐 작년 6월부터 GS건설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다. 검사 출신인 김준호 SK그룹 윤리경영실장도 2012년 SK하이닉스 경영지원 업무를 총괄하는 코퍼레이트센터장을 맡은 뒤 작년 2월 사장으로 승진했다.

법무팀원 중에는 젊은 나이에 고위직에 발탁돼 부러움을 사는 사례도 적지 않다. 삼성전자에서는 엄대현 부사장과 이상주 전무 등 검찰 출신의 40대 고위 임원들이 나오고 있다. 검찰에서 일했던 이종상 LG그룹 법무준법지원팀장도 작년 말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비상 상황에서는 전관 법조인을 구원투수로 투입하는 일도 있다. OCI는 작년 8월 서울지방국세청으로부터 3084억원의 추징금을 부과받자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인 허만 변호사를 경영지원사장으로 선임했다.

법무팀 규모도 계속 커지고 있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변호사 수를 늘려 총 500여명의 법무 전문 인력을 두고 있다. 부장판사 출신인 김상균 사장이 그룹 준법경영실장을 맡아 법률 업무를 총괄하고 10명의 부사장급 변호사들이 김 사장을 보좌하고 있다.

LG그룹도 법무 인력을 매년 두 자릿수 이상 확충하고 있다. 2010년에 100여명이던 변호사 수를 작년 말 150명으로 50% 늘렸다.

SK그룹은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장 출신인 윤진원 부사장을 중심으로 법무팀을 꾸리고 있다. 90명의 변호사를 합해 전체 법무팀 규모를 150명 선으로 키웠다.

지난 11일 김승연 회장의 배임 혐의를 둘러싼 파기환송심에서 집행유예를 이끌어낸 한화 법무팀은 10명으로 이뤄져 있다. 조현일 법무팀장(부사장)이 법무법인과 전략을 짜며 소송을 준비했다.

재계 관계자는 “신사업을 추진하거나 해외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경쟁업체나 특허괴물과의 법률 분쟁을 줄이기 위해 법무팀의 위상이 강화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배석준/정인설 기자 eul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