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5일 임원 인사…껄끄러운 '핑크 슬립' 어떻게…
삼성 계열사 최고경영자(CEO)인 A사장. 그는 임원 인사철인 12월 초엔 가능하면 특별한 일정을 잡지 않는다. 승진자와 퇴임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약속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보내야 하는 임원들에게 무슨 말로 운을 뗄지가 늘 고민”이라며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임 통보를 하는 게 CEO로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삼성 계열사 CEO들은 4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오전에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수요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뒤 곧바로 수십통의 전화를 걸어야 해서다. 그룹 차원에서 5일 임원 인사를 하기 전 승진자와 퇴임자들에게 인사 내용을 통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로 전화로 통보가 이뤄지는 게 관례다. 승진하는 임원에겐 축하 인사를 하고 퇴직 임원에게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넨다. 이메일 혹은 문자메시지나 ‘핑크 슬립(분홍색 해고통지서)’ 등으로 해임 통보를 하는 외국 기업과는 다르다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다. 핑크 슬립은 미국 포드사가 업무 성과에 따라 분홍색 종이로 해임 통보를 한 것에서 유래됐다.

삼성의 핑크 슬립에는 원칙이 있다. 승진자보다 퇴임자를 먼저 챙긴다. 성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CEO는 승진 임원보다는 퇴임자에게 먼저 전화하고 따로 만나곤 한다. 단체로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1 대 1로 석별의 정을 나눌 때도 적지 않다. 해외 출장 중인 임원과 시차가 맞지 않아 통화가 어려우면 먼저 문자메시지를 남긴다.

그룹 차원의 임원 인사 발표 전날까지 이런 작업을 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하다는 게 CEO들의 설명이다. 삼성에서는 매년 300~500명가량의 임원이 승진하고 그 정도의 임원이 옷을 벗는다.

삼성은 퇴직 임원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수십년 동안 회사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함으로써 임직원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취지에서다. 협력회사에 재취업할 수 있도록 적극 다리를 놓아주고 일정 기간 현직의 70~80% 급여와 차량, 사무실 등을 제공한다. 직급에 따라 퇴직자에겐 최대 2년 임기의 자문역을 맡긴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전무 이상 퇴직 임원을 1~2년간 자문역이나 상임고문으로 위촉한다. 이들에겐 현직 때 연봉의 50%를 준다. LG그룹은 사장급 이상 퇴직자에 대해 최대 2년간 고문, 이후 최대 2년간 자문역으로 예우해준다.

또 그룹별로 모임을 만들어 퇴직 임원들이 교류할 기회도 준다. 삼성 성우회(800여명), LG크럽(200여명), SK 유경회(200여명), 두산회(200여명) 등이 대표적이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