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49주년 - 기로에 선 신흥국…20억 시장을 가다] 정치 회오리에 인도 경제개혁안 후두둑
[창간 49주년 - 기로에 선 신흥국…20억 시장을 가다] 정치 회오리에 인도 경제개혁안 후두둑
지난 12일 인도 동부 벵골만을 강타한 초강력 사이클론 ‘파일린’. 시간당 풍속이 200㎞에 달하는 등 14년 만에 가장 강력한 이번 태풍의 피해 지역 가운데 한 곳이 안드라프라데시주다. 공교롭게도 이곳은 최근 인도 정치권의 태풍이 몰아친 지역이기도 하다. 이달 초 인도 내각이 안드라프라데시를 둘로 쪼개 새로운 주(텔랑가나)를 신설하는 법안을 승인하면서 인도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 만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지 힌두스탄타임스는 14일 “사이클론이 정치적 격변을 맞고 있는 안드라 해안을 난타했다”고 보도했다.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텔랑가나 지역의 시위자들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텔랑가나 지역의 시위자들

○총선 앞두고 정쟁 심화…경제는 뒷전

[창간 49주년 - 기로에 선 신흥국…20억 시장을 가다] 정치 회오리에 인도 경제개혁안 후두둑
랑가나는 요즘 혼란스러운 인도 정치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년 5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의 경쟁이 가열되면서 정국이 마비되고 각종 경제개혁 조치들이 뒷전으로 밀려나는 등 정치권의 구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서다.

텔랑가나의 분리 절차가 마무리되면 인도의 29번째 주가 된다. 이를 주도한 것은 집권여당인 국민회의당. 텔랑가나는 여당 선호도가 높은 지역이다. 여론조사에서 앞서고 있는 야당(BJP)을 의식, 총선을 겨냥한 ‘표밭 다지기’용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현지에선 텔랑가나의 분리를 반대하는 7000여명의 화력발전소, 유통 관련 노동자들이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이 여파로 전력이 끊겨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작동이 멈추는가 하면 일부 병원에선 중환자실마저 폐쇄됐다. 역시 분리 요구가 끊이지 않았던 마하라 슈트라주의 ‘비다르바’ 등 20여개 지역을 자극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얼마 전엔 집권당 내부 갈등까지 불거졌다. 인도의 정치 명문 ‘네루-간디’ 가문의 4대 자손으로 집권당 총재인 소니아 간디의 아들이자 차기 총리로 거론되는 라훌 간디(42)의 돌출 행동이 발단이 됐다. 그는 지난달 28일 국민회의당 기자회견장에 불쑥 나타나 “정부의 행정명령안은 완전히 난센스다. 찢어버려야 할 법안”이라는 거친 발언을 쏟아내 파문을 일으켰다. 유죄 선고를 받은 연방 및 지방 의회 의원이 의정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행정명령안이 부패 정치인을 옹호한다고 날을 세운 것이다. 만모한 싱 총리(81)가 정국 안정을 위해 서명한 법안에 실세인 라훌 간디가 반기를 든 셈이다. 라훌 간디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 위해 싱 총리를 제물로 삼을 것이라는 관측은 이전부터 있었다.

정쟁이 가열되면서 각종 경제 개혁법안 처리는 표류하고 있다. 예컨대 인도 정부는 루피화 가치 하락으로 고전하던 지난 8월께 △재정난을 완화하기 위한 부자세 증세 방안을 비롯해 △부동산·건설 분야 외국인 직접투자(FDI) 규제 완화 방안 △철도 프로젝트 FDI 개방안 등을 잇따라 발표했으나 법안 처리 움직임은 거의 없는 상태다. 반면 12억 인구의 3분의 2인 8억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식량안보법’은 이미 통과돼 본격 시행을 앞두고 있다. 델리에 파견 중인 강선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총선 정국으로 급격히 돌입하면서 각종 보조금을 지급하는 포퓰리즘 법안은 쉽게 통과된 반면 보험과 유통시장 개방 등 경제개혁 조치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 목소리 내기 시작한 인도인

민심의 동요도 심상치 않다. 민생을 위해 보다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조짐은 올해 초부터 시작됐다. 잇단 성폭행과 정부의 안이한 대처에 공분한 수천명의 시위자가 몰려 뉴델리의 의회의사당과 대통령궁이 문을 닫은 지난 1월의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4월에 인도 법무부 장관이 의료 과실로 사망한 사건도 예기치 않게 시민들의 불만에 불을 지피는 계기로 작용했다. 장관 유족이 진상 파악을 요구하고 나서면서 비슷한 피해를 입은 일반인들이 가세한 것. 이들은 방송에 나와 정부의 대책 마련을 호소하는 등 집단 민원으로 번질 기세다. 시민단체들도 부패 척결을 요구하면서 정부를 향한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중산층이 점차 늘면서 시민의식이 깨어나고 있는 방증이라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인도에서 활동하는 글로벌 투자자문사 맥스틴의 이건준 공동대표는 “계급을 중시하는 카스트 문화와 내세관을 믿는 힌두교 사상이 뿌리 깊은 인도인들이 비로소 현실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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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인프라가 불만 키워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분노가 표출된 또 다른 원인으로 낙후된 인프라가 꼽힌다.

실제 인도는 전력 사정이 나빠 수시로 전기가 끊긴다. 공장은 물론 각 가정에서도 자체 발전기를 갖추고 있을 정도다. 대부분 비포장인 도로 사정은 특히 열악하다. 지난달 인도 국민의 주요 식재료인 양파 값이 폭등한 이유도 열대성 폭우로 트럭 운송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인도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추진된 564개의 도로, 철도, 전력, 석탄 개발 등 정부 프로젝트 가운데 예정대로 진행 중인 사업은 24%에 불과하고 42%가 지연된 상태다. 아직 위원회 구성조차 안 된 사업도 31%에 이른다. 인프라 부족은 인도 경제 회생에 필요한 제조업 육성을 가로막는 원인이다. 지난달 뭄바이에서 만난 비제 칼란트리 세계무역센터 부의장은 “자본 부족과 행정절차 지연, 공무원 부패 등으로 많은 인프라 개발이 지연되고 있다”며 “인도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인프라 확충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델리·뭄바이·푸네=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

■ 특별취재팀

브라질=남윤선 기자, 박래정 LG경제硏 수석연구위원
인도네시아=김보라 기자, 이지선 선임연구원
멕시코=노경목 기자, 김형주 연구위원
터키=주용석 차장대우, 정성태 책임연구원
인도=이정선 차장대우, 강선구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