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엔저 비명'…더 팔았는데 덜 벌었다
“회사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다들 바짝 긴장하고 있어요.”

현대자동차그룹 경영진에게 ‘24시간 비상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정몽구 회장은 최근 수시로 계열사 사장들을 불러 직접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현대차의 한 고위 임원은 “정 회장이 이달 초부터 매일 출근과 동시에 전날 세계 판매 현황 취합 자료를 꼼꼼하게 체크한다”며 “수시로 임원들을 소집해 엔저 리스크와 수익성 개선 대책, 생산차질 보전 방안 등을 논의한다”고 전했다.

◆1분기 판매량 늘었지만 이익은 줄어

23일 한국경제신문이 단독 입수한 ‘현대·기아차 1분기 글로벌 판매실적 및 시장점유율’ 자료에 따르면 판매량이 175만6676대로 전년 동기보다 6.2% 늘었다. 글로벌 자동차 판매 증가율(1.6%)보다 4배가량 높다. 국내(-3.2%)와 북미시장(-3.4%) 판매량이 줄었지만 중국(34.9%), 브라질(68.1%) 판매가 크게 증가하면서 전체 실적을 끌어올렸다.

반면 경쟁업체인 일본 도요타의 판매량은 감소했다. KB투자증권이 주요 43개국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도요타는 1분기에 168만4313대를 팔아 전년 동기보다 3.6% 감소했다. 판매량만 따지면 현대·기아차는 위기가 아닌 셈이다.

하지만 1분기 매출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도요타와 혼다, 닛산 등 일본 업체들의 1분기 영업이익이 20~60% 늘어난 것으로 추정됐다. 도요타는 판매량 감소로 매출은 10% 줄었지만 순이익(90.6%)은 두 배가량 급증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에 비해 현대·기아차는 순이익이 각각 8.3%, 25.4% 줄어든 것으로 추산됐다. 신정관 KB투자증권 리서치센터 팀장은 “현대·기아차가 판매량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엔저와 내수 침체, 노조문제 등으로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주말 특근 거부로 생산 ‘삐그덕’

현대·기아차 노조는 지난달 초부터 7주 연속 주말 특근을 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한 생산 차질은 4만8000여대, 매출 손실은 1조원(9500억원)에 이른다. 주간 연속 2교대제 전환 후 시간당 생산량(UPH)은 현대차가 402에서 432로, 기아차는 308.3에서 338.3으로 각각 높아졌지만 주말 특근을 하지 않으면 늘어나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다. 현재 싼타페와 맥스크루즈, 그랜저 등 현대차의 인기 차종들을 인도받기 위해선 최장 4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현대차 관계자는 “생산 차질은 국내공장 생산 감소→고정비 상승→실적 악화의 악순환을 가져온다”며 “협력사 중 영세업체들은 주말 특근을 해야 수익성을 맞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동계 관계자는 “올해는 현대차의 임금 및 단체협상이 예정돼 있어 강성 노조인 현 집행부가 회사 측과 쉽게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며 “당분간 특근 거부로 인한 생산 차질이 지속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하반기에 진짜 위기 온다”

회사 밖으로 눈을 돌리면 ‘엔저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일본 아베 정권의 적극적 엔저정책을 등에 업은 일본 업체들은 앞다퉈 차값을 내리며 미국은 물론 국내시장에서도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다. 그 결과 올 1분기 북미 시장에서 현대·기아차의 점유율은 작년 1분기보다 0.8%포인트 줄어든 8.3% 그쳤다. 도요타는 0.2%포인트 늘어난 14.0%를 기록하며 격차를 벌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도요타가 고급 브랜드 ‘렉서스’의 주력 차종인 ‘ES 300h’ 가격을 10.3%(570만원) 내리는 등 내수 침체로 고전하는 현대·기아차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엔저 충격이 2분기부터 본격화해 하반기에는 진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중혁 신한금융투자 책임연구원은 “현대·기아차 판매량은 중국과 브라질을 기반으로 증가세를 유지하겠지만 생산 차질과 엔저 현상이 지속된다면 수익성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며 “노사 갈등 해결과 생산성 극대화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진석 기자 isk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