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휘발유 주춤하자 등유섞은 가짜경유 기승
“가짜석유는 마약과 똑같습니다. 단속의 사각지대에서 부당 이득의 달콤함을 한번 맛보면 헤어나오기 어렵습니다.”

송흥옥 한국석유관리원 수도권본부 검사1팀장은 석유제품 시장에서 가짜석유 유통과 적발이 서로 꼬리를 물듯 악순환하고 있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면세 품목이나 다름없는 값싼 용제를 섞어 만든 제품을 정상 휘발유나 경유와 똑같은 가격에 판매하면 요즘 같은 고유가 시대엔 탈세로 챙기는 부당이득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가짜석유의 제조·유통 방식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더욱 지능화되고 교묘해지고 있다.

◆가짜석유 원료 차단에 주력

가짜 휘발유 주춤하자 등유섞은 가짜경유 기승
2011년까지만 해도 가장 흔한 형태의 가짜석유는 일반 석유제품에 산업용 도료·시너 같은 용제를 혼합해 만든 것이었다. 석유관리원이 2006~2011년 적발한 가짜석유 유형을 보면 용제혼합형 휘발유가 전체의 93%, 용제혼합형 경유는 25%로 나타났다.

하지만 지난해 초부터 용제 불법유통에 대한 집중 단속이 실시되면서 가짜휘발유는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는 게 석유관리원의 분석이다. 실제 2011년 10월부터 작년 9월까지 가짜휘발유의 원료로 쓰이는 용제 1·4호 소비량은 12만7316㎘로 전년 동기(26만2770㎘) 대비 51.5% 줄었다. 강대혁 석유관리원 용제관리팀장은 “그동안 용제 소비량의 절반가량이 가짜석유 원료로 불법 유통된 것으로 추정할 때 용제를 섞어 제조하는 가짜석유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짜휘발유 적발 건수는 43건으로 전년 동기(277건) 대비 84.5% 급감했다.

◆등유 섞은 가짜경유 물량 늘어

문제는 단속의 풍선효과다. 이젠 가짜휘발유 대신 가짜경유 유통이 증가하는 추세다. 주로 가짜 휘발유에 들어가는 용제의 불법 유통이 봉쇄되면서 용제 대신 난방용 등유를 섞은 가짜경유가 시장에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 가짜경유 중 등유혼합형 비율은 2011년 75.5%에서 작년 85.5%로 높아졌다. 등유는 정상 경유와 유질이 비슷하지만 ℓ당 400원가량 싸다. 등유는 주유소에서 합법적으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에 보관이 쉽다. 별다른 혼합 과정 없이 주유기 밑에 이중 탱크를 설치해 차량에 주유할 때마다 경유와 등유를 단순 혼합하면 적발될 가능성도 낮다.

최근에는 단속에 대비해 이중밸브를 설치, 리모컨으로 조정하며 경유와 등유를 순차적으로 주입, 판매하는 주유소가 잇따라 적발되고 있다.

◆첨단 적발장비 총동원

지능화하는 가짜석유 유통·판매업자에 맞서 석유관리원의 단속장비 및 수사기법도 진화하고 있다. 이중 탱크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해 산업용 내시경을 통해 저장 탱크 안을 살펴보는 일은 이제 일상적인 단속 업무가 됐다.

내시경 화면으로 탱크 내 용접 흔적을 살펴보면 이중 탱크를 만들기 위해 설치한 격벽 등을 발견할 수 있다. 비등록 비밀 저장탱크를 찾아내기 위해 음파로 땅속 사물을 찾는 지하매설물 탐지장비(GTR)가 동원되기도 한다. 사회연결망분석(SNA) 등 첩보사건에서 주로 사용되는 과학적 수사기법도 도입했다. SNA는 석유판매사업자의 계보와 가짜석유 제조판매 연결도 등을 활용해 가짜석유 우범자들의 연관관계를 추론하는 분석기법이다.

◆석유 유통 전 과정 투명 공개

정부는 가짜석유 근절을 위해 석유 유통과정을 전산화하는 ‘석유제품 수급보고 전산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 사업의 핵심은 내년 하반기까지 석유 불법유통 징후를 매일 점검할 수 있도록 수급과 거래 상황 보고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정유사와 대리점, 주유소의 전산장치를 통합 서버와 연결해 구매·판매·재고 등의 물량 정보를 정부가 직접 관리한다.

현재 물량정보는 월 1회 수기로 보고하는 게 전부지만 전산시스템이 구축되면 매일 수급과 거래 상황을 자동 보고해야 한다. 주유소에 들어오는 입하량과 판매량을 비교, 일치하지 않을 경우 가짜석유 유통업소로 지목돼 현장 단속을 받게 된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석유 유통과정의 전산화를 통해 연간 1조원에 달하는 가짜석유 탈루세액의 상당 부분을 세수로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용제

어떤 물질을 녹일 수 있는 액체 상태의 유기화학물질로 휘발성이 강하다. 페인트용 원료, 희석제(시너), 세척제, 윤활유 원료 등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사용된다. 다른 석유제품과 달리 유류세가 부과되지 않는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