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홋카이도 쓰베쓰(津別) 마을은 자동차로 30분 이내 거리에 주유소가 하나도 없다. 고치현의 오미야(大宮)도 주민들이 이용하는 유일한 주유소가 시내에서 40㎞나 떨어져 있다. 고령화에 따른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도시 인구가 줄면서 경영수지를 맞추지 못한 중소도시 주유소들이 잇따라 폐점한 것이다. 이들 도시에선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승용차를 몰고 인근 대도시로 주유하러 ‘장거리를 뛰는’ 모습을 어렵잖게 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19일 대통령 선거일 전국 투표소.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줄지어 늘어선 50대 이상 고령층의 투표행렬로 투표소마다 장사진을 이뤘다. 50대의 투표율(출구조사 기준)은 89.9%, 60대 이상은 78.8%로 세대별 투표율에서 1, 2위를 차지하며 2030세대를 압도했다. 5060세대가 전체 투표에서 차지한 비중도 45.0%로 절반에 육박했다. 현재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력은 50대 이상이라는 사실을 ‘실력행사’로 보여준 것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늙은 국가’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늙어가는 나라다. 두 나라 모두 사회 주력세대가 나이 들면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일본의 장기불황 원인 중 하나가 인구 고령화다.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넘는 국가부채를 짊어진 일본은 ‘재정위기의 아이콘’ 그리스보다 재정적자가 심각하다. 1990년대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고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누적됐다. 노년층에 대한 사회보장 지출이 늘어난 반면 세입은 줄어 적자가 확대된 것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빠른 고령화와 함께 △사회보장 지출 확대 △잠재성장률 하락 △재정의 승수효과 하락 등 ‘일본화 현상’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주유소 실종과 ‘구매 난민’

일본은 2006년 65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어선 초고령사회 국가다. 일본의 생산가능인구는 1992년 정점을 찍었는데, 이는 거품경제의 꼭짓점과 거의 일치한다.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부동산 수요가 줄고, 노동생산성이 떨어진 것이 경제 전반의 활력을 저하시켰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연금과 사회보장 비용에 대한 부담은 커진 반면 각종 투자의 효율은 떨어지고 있다.

이 같은 고령화 ‘그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주유소 부족 사태다. 2009년 이후 연평균 1700여개의 주유소가 매년 문을 닫고 있다. 한때 일본 전역에서 6만개가 넘던 주유소는 지금 4만개 수준으로 감소했다. 2만개까지 줄어드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전망이다. 도시공동화는 빈집 증가에서도 확인된다. 2008년 현재 일본의 빈집은 756만가구로 전체 주택(5759만가구)의 13%를 차지한다. ‘흉가’로 변한 주택이 도쿄에서만 10만가구를 웃돌고, 매년 3000가구가 새롭게 빈집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1960~1970년대 대도시 인근에 지어진 ‘뉴타운’들은 을씨년스러운 ‘올드타운’으로 변해 버렸다. 뉴타운이 ‘노인만의 거주공간’으로 인식되면서 청·장년 세대가 이탈해 도시가 유령도시화됐다.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일본의 소매점 점포는 1982년 172만여개에서 2007년 114만여개로 급감했다. 최근 10년 동안에만 20%가량 줄었다. 때문에 생필품을 원할 때 사지 못해 곤란을 겪는 이른바 ‘가이모노 난민(買い物難民·쇼핑 난민)’이란 말이 2000년대 들어 유행어가 됐다. 두부 한 모를 사기 위해 5㎞ 이상을 걷거나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는 ‘쇼핑 난민’이 600만~800만명에 이른다.

이우광 한일산업기술협력재단 자문위원은 “일본 경제는 ‘단카이 세대’가 나이 들어 가는 과정과 똑같이 변화했다”며 “단카이 세대가 자녀들에게 방을 주기 위해 주택 구입붐이 일었고, 단카이 주니어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거품이 붕괴됐고, 이제 생산가능인구가 감소하면서 경제가 활력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일본화 현상, 한국도 남의 일 아니다

고령화에 따른 ‘일본화 현상’이 한국에서도 재현될까. 한국의 인구 고령화와 그에 따른 재정 악화는 아직까지는 일본과 거리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인구 고령화 속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7% 이상인 ‘고령화사회’에서 14% 이상인 ‘고령사회’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일본은 24년이었던 반면 한국은 18년 정도로 예상된다. 한국은 2016년부터 생산가능인구가 감소세로 돌아설 전망이다.

복지수준에 대한 국민들의 눈높이가 높아지고 있는 점도 일본화 가능성을 더한다. 고령화에 따른 투자위축과 사회보장비용 증가라는 부담이 우려되고 있어서다. 1990~2009년 일본의 65세 이상 고령층에 대한 1인당 복지 지출은 연평균 2.2% 증가했다. 하지만 고령층 인구가 1995년 1489만여명에서 2010년 3083만여명으로 늘어난 탓에 고령자 복지지출 총액은 연평균 5.9% 증가했다. 단순히 복지비용만 느는 게 문제가 아니다. 노년층 복지에 쓰인 재정은 승수효과도 거의 없어 경기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령화에 따른 구조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치권은 단기간에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포퓰리즘적 복지정책을 거두지 않았다. 재정 개혁도 계속 뒤로 미뤘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 경제는 고령자 복지 지출이 급증하고, 생산인구 감소로 잠재성장률이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진단했다. 고령화에 따른 일본화 현상의 위험은 결코 먼 얘기가 아니다.

김동욱 기자/도쿄=안재석 특파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