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잃어도 신뢰는 지켜…재기 밑천 됐죠"
2004년 여름.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6월 이후 석 달간 비가 내린 날은 모두 42일이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보면서 안귀남 당시 길도레미콘 영업담당 사장(47·사진)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레미콘 장사는 비가 오면 끝이다. 콘크리트 타설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회사 재정 상태가 악화돼 한 곳이라도 더 많은 납품처를 찾아야 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겨울이 오자 건설현장이 멈췄다. 안 사장은 겨울 내내 불길한 예감에 시달렸다.

결국 이듬해 부도가 났다. 멀쩡하던 대기업을 뛰쳐나와 왜 사업을 시작했을까 하는 자책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그의 첫 직장은 금호산업. 아파트 재개발부터 분양은 물론 총무 인사에 자재 담당까지 거쳤기 때문에 레미콘 사업체를 꾸릴 때도 자신만만했다. 실패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지금은 연매출 200억원의 어엿한 철강유통회사로 자리잡은 케이엔스틸을 이끌고 있지만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식은 땀이 흐른다고 했다.

부도 이후 혹독한 시간이 찾아왔다. 돈 한푼 벌지 못하고 퇴직금만으로 1년6개월을 버텨야 했다. 그는 재기를 꿈꾸며 이를 악물었다. ‘백수’였지만 새벽 6시에 일어나 대전 한밭대 도서관에 가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경영과 건설 관련 서적을 두루 읽었고 맹자와 장자도 봤다. 반드시 성공할 기회가 올 것이라며 자신을 다그쳤다. 하지만 실패는 다시 찾아왔다. 2006년 본인과 지인들의 돈을 긁어모아 5억원을 투자했던 세실이 상장폐지된 것이다. 진딧물 같은 해충을 천적 곤충으로 박멸하는 회사였는데 2007년 11월 코스닥에 상장됐다가 정부 보조금 횡령이 드러난 것. 투자금은 모두 허공으로 날아갔다. 세실의 자회사로 유리 온실 사업을 하는 세이프슈어의 영업권을 따보려는 욕심도 물거품이 됐다.

다시 수렁 속으로 빠졌지만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또다시 지인들의 투자를 받아 레미콘 첨가제 사업을 차렸다. 투자자들은 과거 레미콘 사업을 할 때 사귀었던 사람들이었다. 안 사장은 이때 신뢰의 중요성을 실감했다고 한다. 레미콘 사업이 망할 때 제법 깔끔하게 뒤처리를 했던 것이 큰 자산이 됐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등기이사가 아니어서 ‘빚 잔치’에 나설 필요가 없었지만 당당히 빚 독촉을 받았다. 굳이 출근할 필요가 없었지만 채권자를 응대하고 직원들의 퇴직금을 챙겨줬다. 레미콘 첨가제 사업은 지난해 52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1억5000만원이 넘는 당기순이익을 올렸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두 번째로 세운 회사가 케이엔스틸이다. 케이엔스틸은 건축에 필요한 철근 등 철강재를 주로 파는 회사로 소규모 건축현장 등 대형 철강회사나 중간 유통회사가 미처 살피지 못한 틈새시장을 효율적으로 공략한 덕분에 단기간에 자리를 잡았다.

여직원 한 사람만 데리고도 연 200억원의 매출을 거뜬히 올리고 있다. 안 사장은 또다시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언제든 다시 재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실패와 신뢰를 통해 얻은 자신감이다. 신용보증기금에서는 사업계획를 보고 1년도 안된 회사에 6%대 저리로 5억원을 빌릴 수도 있었다. “지난 과정을 돌이켜보면 실패가 최고의 자산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노력하다보면 반드시 기회가 옵니다. 제게도 지금이 출발선입니다.”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