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의 가로수길, 강남역 등과 함께 서울의 대표 유흥가로 꼽히는 서울 홍익대 앞 상권. 소비문화의 최신 트렌드를 선도하는 이곳은 아이로니컬하게도 199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 밤과 음악사이, 아이러브케이팝 등 클럽형 주점에서부터 라디오스타, 남녀공학, 프리 사운드, 달동네 등 일반 주점에 이르기까지 골목마다 1990년대를 컨셉트로 한 술집이 자리잡고 있다. 홍대의 밤거리가 서태지 듀스 R.ef 등이 부른 1990년대 히트곡으로 가득차게 된 이유다.

KT&G 상상마당 앞 큰 길가는 아예 ‘복고풍 떡볶이골목’으로 변신했다. 조폭떡볶이, 국대떡볶이, 박군네 즉석 떡볶이, 맛튀먹튀 등 ‘1990년대 학교 앞 떡볶이집’을 연상케 하는 업소들이 2년여 전부터 차례차례 들어섰다. 최근엔 나무 책걸상, 구슬치기용 유리구슬, 미니 오락기 등 198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30~40대들의 ‘추억 소품’들로 장식한 카페(순이네다락방)도 등장했다. 유행의 첨단을 걷던 홍대 상권이 1990년대로 ‘컴백’한 것은 당시 대학생이었던 30~40대들이 한국 사회의 핵심 소비층으로 성장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사회·문화적으로 ‘뜨는’ 분야에는 자연스럽게 시중의 돈도 몰리는 법.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신(新)복고’가 유행하면서 관련 산업도 빠른 속도로 커지고 있다.

◆‘7080’ 밀어낸 ‘90 열풍’

몇 년 전만 해도 복고의 중심은 ‘7080’이었다.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등 1970~1980년대 통기타 전성시대를 연 가수들이 TV프로그램과 공연장을 휘어잡으며 7080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올 들어 복고의 중심은 1990년대로 뚜렷하게 이동하는 모습이다. 400만명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 ‘건축학개론’이 불을 지폈고, 케이블 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꽃을 피웠다. ‘1980~1990년대 이야기는 흥행 보증수표’란 공식이 생기면서 투자자들도 신복고 아이템 찾기에 혈안이 됐다.

건축학개론에 투자한 캐피탈원(16억원) CJ창업투자(6억원) 동문파트너스(2억원) 이수창업투자(2억원) 등은 150%가 넘는 투자수익률을 거둘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범죄와의 전쟁’에 10억원을 넣은 미시간벤처캐피탈은 17억2200만원을 회수했다. 영화 투자업계에선 20~30% 수익만 내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점을 감안하면 ‘대박’을 친 셈이다. CJ E&M이 수십억원을 들여 1980~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전설의 주먹’ 제작에 들어간 것도 “신복고는 흥행 불패”란 최근의 경험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벤처캐피털 업계 관계자는 “신복고 스타일은 티켓 파워가 있는 30~40대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투자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아이템”이라고 말했다.

신복고 붐은 공연으로 확대되고 있다. DJ DOC, 쿨, 클론, 김건모 등 1990년대 가수들이 지난달 서울 부산 대구 안양 등지에서 연 ‘청춘나이트 콘서트’는 평균 80%가 넘는 객석점유율을 기록했다. 기획사인 서던스타는 룰라 등 새로운 팀을 보강해 12월 전국 10개 도시에서 2차 공연에 나서기로 했다.

신복고가 뜨면서 7080의 기세는 한풀 꺾인 모습이다. 7080의 ‘메카’인 미사리 카페촌이 하남·미사 보금자리주택지구로 편입되면서 한때 40여개에 달했던 라이브 카페들이 차례차례 문 닫은 것도 7080 쇠락에 한몫했다는 분석이다.

◆기업들 “신복고를 잡아라”

발빠른 기업들은 한껏 주가가 오른 ‘1990년대 복고’에서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패션업체 아마넥스는 1990년대에 인기를 끈 캐주얼 브랜드인 ‘노티카’를 다시 들여와 이번 가을·겨울 시즌에 아웃도어 스타일로 내놓았다. 아마넥스를 이끄는 최병구 회장은 최병오 패션그룹 형지 회장의 친동생이다. 최 회장은 “1990년대에 노티카를 캐주얼 의류로 입었던 20대 고객이 30~40대로 접어든 점을 감안해 아웃도어로 변신시킨 것”이라며 “1990년대 복고 바람이 판매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원이 ‘1990년대 브랜드 되살리기’에 나선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신원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운영하던 여성 캐주얼 브랜드 ‘아이엔비유’를 2010년 다시 내놓았다. 올 들어선 잡화 브랜드 ‘세스띠’를 재론칭했다. 세스띠는 신원이 1994년 선보였다가 외환위기 여파로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선택과 집중 차원에서 접었던 브랜드다.

게임업계도 ‘죽은 자식 살리기’에 한창이다. 스트리트파이터, 1945 등 1980~1990년대 오락실을 휩쓸었던 대작들을 스마트폰용 게임으로 내놓고 있다. 1980년대 초등학생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must have item·반드시 가져야 할 상품)이었던 ‘부루마블’을 온라인으로 옮겨놓은 ‘모두의 마블’은 30~40대의 전폭적인 지지에 힘입어 최근 PC방 게임점유율 10위(1.94%·게임트릭스 조사)에 올랐다.

◆개인들도 신복고 창업 바람

신복고는 창업시장에서도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손님들이 신청한 노래를 DJ가 틀어주는 옛날식 호프·주점인 ‘DJ.봉닭이’도 그중 하나다. DJ.봉닭이는 지난해 문을 연 서울 영등포 1호점의 성공 체험을 토대로 최근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었다. 1990년대 인기 그룹 R.ef의 리더 이성욱 씨도 경영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대표 오락이었던 당구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전국 100여개 체인점을 거느린 ‘빌리어드 뱅크’의 서종하 영업총괄 이사는 “2000년대 중반만 해도 당구장이 있던 자리에 PC방이 들어섰는데, 이제는 PC방이 망하면 그 자리에 당구장이 생긴다”며 “특히 1990년대 열풍이 불기 시작한 올 여름부터 가맹점 개설 문의 전화가 평소보다 2~3배 늘었다”고 설명했다.

이상헌 창업경영연구소장은 “경기가 악화되면 ‘과거 좋았던 시절’을 되새기고 싶어하는 수요가 늘어난다”며 “경기침체와 신복고 열풍이 맞물리면서 창업시장에서도 1990년대가 인기 아이템으로 등장했다”고 말했다.

오상헌/오동혁/김주완/김태호 기자 oh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