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발목을 잡은 것은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에서 빌렸다고 밝힌 1조2000억원이었다. 현대건설 채권단은 이 자금의 출처를 놓고 시장에서 논란이 일자 현대그룹 측에 대출계약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이 끝내 거부했고 이는 양해각서(MOU) 해지 이유가 됐다.

현대그룹은 지난해 11월 현대건설 인수 의향서를 제출하며 인수 자금 총 5조5100억원 중 1조2000억원을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의 예치금으로 조달하겠다고 설명했다. 예금 잔액 증명서가 입찰서류에 포함됐고 채권단 측이 외환은행 현지지점 등을 통해 자금이 입찰 당일 계좌에 예치돼 있는 것을 확인했기에 처음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해당 자금의 예금주가 자산 규모 33억원에 불과한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논란이 불거졌다. 일반적으로 예금은 자산으로 잡히기 때문에 현대상선 프랑스 법인이 1조2000억원짜리 예금통장을 갖고 있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소규모 현지법인이 현대건설 인수자금의 20% 이상을 떠안는다는 점도 석연치 않았다.

채권단이 자금 출처를 밝히라고 요구하자 현대그룹은 "나티시스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고 현대그룹 계열사나 현대건설 주식 등을 담보로 잡히지 않았고 보증도 없다"고 소명했다. 소명이 있은 뒤 오히려 현대그룹이나 현대건설 경영안정성을 해칠 이면계약이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불거졌다.

자산 33억원짜리 회사가 1조원이 넘는 돈을 무담보 · 무보증으로 빌렸다는 주장이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채권단은 대출계약서 제출을 요구했지만 현대그룹은 이를 거부했다. 채권단은 현대그룹이 명확하게 자금 출처를 밝히지 않자 MOU를 해지했다.

하종선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 사장은 가처분 신청 1차 심리가 열린 지난달 22일 이 자금을 브리지론(임시 대출)이라고 해명했다. 브리지론이란 본대출을 일으킬 것을 전제로 일시적인 시간 간격을 메우기 위해 사용되는 임시 단기대출이다. 앞으로 본대출을 받을 때 담보나 보증이 제공될 소지가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 사장의 해명이 있은 뒤, 입찰 심사 때 채권단이 브리지론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자금의 불확정성과 계약 이후 재무적 부담 증가 등을 고려해 현대그룹의 점수를 깎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금융권 관계자는 "입찰에 참여한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의 선정 점수 차이가 1점 미만이었기 때문에 우선협상대상자가 뒤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브리지론의 문제점이 제기되자 현대그룹은 지난달 24일 2차 심리에서 "하 사장은 브리지론과 유사한 것이라고 말했을 뿐 브리지론이라고 언급한 적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현대그룹은 1조2000억원에 대해 처음엔 예금이라고 했지만 이후 브리지론이라고 말을 바꿨고,브리지론이라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자 또다시 브리지론이 아니라고 해명해 채권단뿐 아니라 법원의 신뢰까지 잃었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