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엘리트 관료들이 모이는 과천 경제부처의 L국장.1980년대 초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 올해로 관료생활 27년째다. 수습 사무관 시절 선망의 대상이던 재무부에 배치돼 쟁쟁한 선배들로부터 일을 배웠다. 서기관 때는 국제기구 연수도 다녀왔다. 금융실명제,금리자유화 등 경제사의 획을 긋는 주요 정책 입안에 참여한 경제관료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관료의 꽃'으로 불리는 국장도 남보다 먼저 승진했다.

하지만 나이 50대 초반인 지금,그는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다. '가'급(옛 1급 · 관리관) 승진을 앞두고 있지만 올라갈 자리가 마땅치 않다. 올해 승진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이다.

갈 산하기관도 없다. 과거엔 국장을 하다 그만두면 아무데나 골라 갔지만 지금은 언감생심이다. 그렇다고 모아둔 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연봉은 7000만원대 초반 정도.대기업에서 임원을 단 대학동기들에 비하면 형편없다. 대학생과 재수생인 두 아들 학비 대기도 벅차다.

청운의 꿈을 품고 관료가 된 이후 남들보다 열심히 일했고 스스로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L국장은 요즘 "몸 바쳐 일한 결과가 이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밤잠이 안 온다"고 한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창문 너머 관악산을 멍하니 쳐다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같은 고민은 L국장만의 얘기가 아니다. 2010년 현재 과천 경제부처에 몸담고 있는 3급(부이사관) 이상 고위 공무원들의 평균적인 모습이다.

관료사회에 정통한 한 대학교수는 "한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고 이끄는 고위 관료들이 인사철만 되면 승진에 목을 매야 하고 퇴임 후 자리 알아보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국가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라며 "이들의 능력을 믿고 세금을 낸 국민들한테도 배신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경제관료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경제 근대화 주역으로서의 자부심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정치논리에 휘둘려 원칙을 포기해야 하는 일도 다반사다.

재정부 한 국장은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는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했던 원칙과 소신이 송두리째 날아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며 "솔직히 이럴 때는 관료를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고 말했다. 자식이 관료를 지망한다면 도시락을 싸들고라도 말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러다보니 경제관료에게 요구되는 투철한 국가관이 예전만 못하다. 전문자격사 진입규제 완화를 추진하다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옮긴 모 경제부처 국장은 "심지어 민간 이익집단의 눈치까지 살펴야 해 정부가 정책을 제대로 펼 여지조차 없다"고 하소연했다.

고위 관료들은 정년도 보장되지 않는다. 일반 공무원은 60세 정년까지 일하는 경우가 많지만 고위 관료는 인사에서 밀리면 퇴직이다. 차관 승진을 하지 못하고 옷을 벗는 경제부처 1급 공무원의 평균 나이가 50대 초반인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민간기업보다 정년이 짧다.

옷을 벗더라도 갈 곳이 마땅치 않다. 모 경제부처는 2~3년 전 차관으로 퇴직한 2명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민간 대기업에 비해서는 경제관료들의 급여가 적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경제부처 초임 국장급(23~24호봉)이 받는 월급(상여금 포함,실수령액 기준)은 450만~500만원 정도.서민이 보기에는 적은 돈이 결코 아니지만 민간 대기업을 선택한 친구들과 비교하면 쪼들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과거에는 퇴직 후 산하 기관장이나 고위 임원으로 갈 경우 수억원의 연봉을 받아 한번에 만회가 됐지만 이것도 대다수 부처에선 옛말이 됐다. 중앙부처 고위공무원을 하면서 집 없이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