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들이 지갑을 열지 않아 상점들의 가격전쟁이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한 벌에 5000~8000엔 하던 청바지가 880엔까지 떨어졌을 정도예요. "

일본 도쿄에서 만난 한 이코노미스트는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이 심각한 상황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고가 제품을 파는 백화점들은 속속 문을 닫는 반면 '100엔 숍'에는 손님과 물건이 넘친다"며 "디플레이션이 엔고보다 무섭다"고 고개를 저었다.

실제 일본은 소비 위축으로 활기를 잃고 있다. 도쿄 중심부인 긴자에서 히비야역 사이는 고층 사무빌딩들이 즐비한 번화가인데도 퇴근시간대엔 가격이 싼 뒷골목 선술집만 북적거릴 뿐 고급 일식집 쪽은 한산한 분위기다. 늦은 시간에도 택시들은 손님이 없어 매일 긴 줄을 잇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실질 GDP(국내총생산)는 5.3% 줄어 2년 연속 하락했다. 2005~2007년에 반짝 살아나는 듯했던 경기가 다시 뒷걸음치는 형국이다.

특히 소비자물가는 2008년 1.4% 상승에서 지난해 1.1%로 떨어졌고,올해도 0.8% 하락할 전망이어서 가계소비가 급격히 위축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일본 경제가 1990년대 자산가격 거품 붕괴로 인한 침체국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며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20년'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대해 미즈호종합연구소의 나카지마 아쓰시 전무는 "일본 경제의 시스템이 시대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일본 기업들이 종신고용 · 연공서열 · 팀워크 등 3대 요소를 중시하는 기존 경영스타일을 개인의 생산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변신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일본 정부도 어려운 경제상황을 타개할 돌파구가 없어 갑갑한 모습이다. 나카오 다케히코 재무성 국제국장은 "중산층이 두텁다는 게 일본의 자랑이었는데 비정규직이 늘고 정규직 비중이 줄면서 안정적인 일자리가 현안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일본 경제의 미래가 불안한 것은 재정적자가 심각하다는 데 있다. 소비 위축을 보완하기 위해 재정 지출을 늘린 결과 GDP 대비 정부 총채무비율은 지난해 말 179%(재무성 발표)나 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대외차입금까지 포함하면 이 비율이 229%로 주요 국가 가운데 최고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재정적자 규모가 앞으로 더 확대될 것이라는 점이 일본의 고민이다. 이는 지난해 8월 총선(중의원)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며 자민당에 압승,정권교체를 이룬 민주당의 선거공약과 맞물려 있다.

민주당은 그동안 공공공사 위주로 재정 지출을 늘려왔던 것을 비판하며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란 슬로건을 내세워 공공사업비를 대폭 줄이는 대신 가계에 직접 매년 2조엔 상당의 보조금을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문제는 보조금 지원 내용이다. 자녀 1명당 월 1만3000엔 지원,공립고교 무상교육 등이 대표적이다.

자민당은 고사하고 재계와 언론, 민간 경제 전문가들도 성장이 아쉬운 판에 하토야마 내각이 포퓰리즘 성격이 강한 분배정책으로 재정난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불만을 표명하고 있다. 일부 경제 각료들도 현 상황에서는 가계에 보조금을 줘도 쓰지 않아 소비진작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실효성을 의문시하는 분위기다.

이 같은 불만은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지 6개월이 넘은 지금,당초 표방했던 개혁과 양극화 해소는 진전이 없고 구체적인 성장책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과 맞물려 정치 이슈화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하토야마 내각 지지율이 추락하고 있다. 정치 전문기자인 교도통신 사이카와 다카스미 논설위원은 "출범 당시 75%였던 하토야마 내각 지지율은 현재 36%로 급감했고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49%로 높아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민주당은 지지율이 29%로 아직 24%대인 자민당을 앞서지만 경제문제 외에 정치자금 수수, 미군기지 이전 난항 등 악재를 안고 있어 중간선거 격인 오는 7월 참의원 선거에서 목표인 과반수 의석 확보가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여당인 민주당에 대한 실망은 정치 리더십의 부재 내지 불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 재계에선 도요타자동차의 리콜사태가 큰 파문으로 확산된 것은 민주당의 대미외교 역량 부족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한 재계 원로는 "예전 자민당 같았으면 물밑으로 미국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화해서라도 문제가 커지는 것을 막았을 것"이라며 못마땅해 했다.

도쿄=문희수 논설위원 m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