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면,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

일본 미쓰비시 연구소는 삼성이 한국반도체 지분을 인수,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1974년 이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기술 수준이 낮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도태할 것이라는 게 보고서의 요지였다. 재계 안팎에서도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회의적인 반응 탓이었다.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등 관련 부처들도 "세계적으로 과잉 투자돼 있고 기술자도 없는데 무슨 반도체냐"며 반대했을 정도였다.

예상대로 사업 초기부터 반도체 관련 기술 확보 문제는 녹록지 않았다. 해외 업체에 지분을 양보하고서라도 기술을 도입하려 애썼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룹 내부에서조차 "반도체 사업을 지속하면 그룹이 망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미쓰비시 연구소의 예언은 10년 후인 1983년 허언(虛言)이 됐다. 같은 해 삼성이 자력으로 64K D램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10년간 과감한 연구개발(R&D)과 투자를 포기하지 않은 결과였다. 이후 삼성은 잇달아 256K D램을 개발했으며 1987년에는 1Mb(메가비트) D램을 선보이며 세계 반도체 업계를 긴장시켰다.

본격적인 반도체 신화는 1990년대에 들어 시작됐다. 권오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장(현 반도체총괄 사장)에게 '일본보다 먼저 64Mb D램을 개발하라'는 특명이 떨어지면서다. 당시 변방으로 취급받던 삼성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2년간 밤샘 작업에 매달려 세계 반도체 시장을 석권한 도시바 히타치 등 일본 기업들을 따라잡았다. 그리고 1992년 세계 최초로 64Mb D램을 개발했다. 이 한국발(發) 뉴스는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한국이 일본의 반도체 주도권을 넘겨받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반도체 신화는 TV로 이어졌다. 일본보다 10년 늦은 1994년부터 시작한 LCD패널을 2003년부터 삼성전자 및 LG디스플레이가 석권했으며 소니와 샤프 등 일본 업체들이 주름 잡았던 TV 시장도 2005년부터 한국 전자업체들이 평정했다. 1966년 금성사(현 LG전자)가 국내 처음으로 6만원짜리 흑백 TV를 만들어 팔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반도체와 TV의 공통점은 시장 진입 당시 어느 누구도 현재와 같은 성공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미래 먹을거리로 거론되는 항공,방산,원전산업 역시 반도체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산업계에서는 "우리가 그런 사업에서 세계 1위는커녕 돈이나 제대로 벌 수 있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많다. 그러나 기존 국내 주력 산업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중국과 일본에 낀 샌드위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항공,방산,원전 등 새로운 제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은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장석인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실장은 "반도체를 비롯해 자동차 조선 등 현 주력 산업의 성장사를 돌이켜보면,모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낸 후 규모의 경제를 창출하면서 위상을 확보했다"며 "마찬가지로 원전 등 시스템 사업과 항공,방산 등 새로운 영역에서도 우리의 잠재력을 폄하하지 말고 전략적인 접근을 통해 중국 인도 중동 등의 신흥시장을 빨리 선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