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새뮤얼슨 교수는 경제학에 수학적 기법을 적용함으로써 현대 이론경제학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신고전파 및 케인스학파의 중요한 경제학적 문제를 수학적 도구를 활용해 분석 · 발전시킴으로써 경제학에 수리경제학이란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7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것도 경제학의 분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업적을 인정받은 데 따른 것이었다.

그가 학자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1941년 자신의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저술한 '경제학 분석의 기초'라는 책을 출간하면서부터다. 이 책을 통해 고인은 시장균형이 어떤 조건에서 안정적인가를 설명했다. 이 논문 덕분에 고인은 미국 경제학회가 40세 미만의 유망한 젊은 경제학자에게 주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는 생산이론에서부터 소비자선택,국제무역 · 금융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주제를 다룬 수백편의 논문을 발표했을 만큼 왕성한 연구활동을 펼쳤다.

케인스 경제학과 신고전파 경제학을 종합한 신고전파 종합이론을 확립했으며 자유무역의 신봉자다. 민주당원인 새뮤얼슨 교수는 존 F 케네디 대통령 후보에게 당선 후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감세정책을 펼 것을 권유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면서 감세정책이 시행되지 못했지만 뒤를 이은 린든 존슨 대통령이 감세를 단행하기도 했다.

항상 열정적으로 연구하고 논문을 써온 고인은 자신의 이론을 일반인에게 쉽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를테면 주가 움직임과 경제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때는 "주가로 경제 사이클을 예상할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주식시장은 최근 다섯 번의 경기침체가 빚어지는 동안 아홉 번의 침체 사인을 내보냈다"며 주가의 불규칙성을 강조했다.

1915년 인디애나주에서 태어난 새뮤얼슨 교수는 시카고 하이드파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6세였던 1932년 시카고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서 맬서스의 인구론을 듣는 순간 경제학에 심취하게 됐다고 한다. 훗날 이날이 자신이 새로 경제학자로 태어난 날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시카고대 교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버드대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았다. 22세에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촉망받는 계량경제학자로서 부상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제임스 토빈 예일대 교수는 "젊은 새뮤얼슨은 공부할 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편협한 이론을 강의하는 교수들을 서슴없이 비판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해 초 새뮤얼슨은 월스트리트저널(WSJ)과 가진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공황기에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이 경제학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교실에서 배운 것'과 '거리에서 들은 것'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새뮤얼슨은 1940년에 처음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6년 만에 정교수가 됐으며,최근까지 석좌교수로 재직할 정도로 평생을 이곳에서 강의하면서 MIT 경제학과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일으켜세웠다. 제자 중에는 로렌스 클라인과 조지 애컬로프,조지프 스티글리츠 등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도 적지 않다. 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제자 중 한 사람이다. 버냉키 의장은 "경제학의 가장 위대한 스승 가운데 한 명"이라며 애도의 뜻을 밝혔다.

시카고 학파의 창시자로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 교수(2006년 타계)와는 경제이론을 놓고 서로 다투면서 친분을 쌓았다. 새뮤얼슨 교수와 달리 프리드먼 교수는 항상 국방과 법 집행을 제외한 어떤 영역에서도 국가의 개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물론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새뮤얼슨 교수도 정부가 개입해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케인스주의의 낙관론을 상당 부분 접기도 했다.

고인은 시대를 풍미하는 경제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했고 주위 교수들에게도 겸손할 것을 요구했다.

고인은 경제학자 로버트 새뮤얼슨과 형제이며 로렌스 서머스 국가경제회의(NEC) 의장의 삼촌이다. 서머스 의장은 "고인은 연구와 저술 활동을 통해 미국 경제에 어떤 경제 관료나 대통령보다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했다.

뉴욕=이익원 특파원 ik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