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원 과징금을 둘러싼 진검승부'가 시작됐다. 12일 공정거래위원회 건물 6층 전원회의실.액화석유가스(LPG) 회사의 담합 혐의로 사상 최대의 과징금을 물리려는 공정위 심사관들과 업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심사관들은 리니언시(Leniency · 자진담합신고제)를 신청한 SK가스와 SK에너지 관계자들의 침묵 속에 이들 업체가 갖고 있던 6개 회사의 가격 정보를 제시했다. 반면 LPG 수입사인 E1과 공급사인 현대오일뱅크,GS칼텍스,에쓰오일 등은 심사관이 제시한 가격 정보가 당시 실제 가격과 다르다는 점을 근거로 담합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오후 2시에 시작된 회의는 4시간 가까이 이어졌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공정위의 객관성 논란

담합 혐의의 발단은 SK가스와 SK에너지의 자진신고(리니언시)였다. 두 회사는 LPG수입업체 2곳(E1,SK가스)과 공급회사 4곳(SK에너지,현대오일뱅크,GS칼텍스,에쓰오일)이 가격 담합을 했다고 공정위에 알려왔다. 공정위는 이 신고를 토대로 가격정보를 검증했다. 조사결과 수입업체인 SK가스와 E1이 공급가격을 맞췄고 나머지 4개 회사는 이 두 회사의 가격을 미리 알아 시장가격을 결정했기 때문에 담합이 분명하다고 공정위는 주장했다. 공정위는 2003년부터 6년간 6개 LPG 업체들의 ㎏당 평균 판매가격이 1원 이상 차이를 보이지 않고 총 72회에 걸쳐 판매가격 관련 정보를 교환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관련 매출규모를 22조원으로 잡고 여기에 5% 수준인 1조원가량의 과징금을 부과할 계획이었다. 과징금은 부당 매출액의 10%까지 물릴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진신고를 하지 않은 회사들은 자진신고를 한 SK가스와 SK에너지가 갖고 있는 가격정보와 실제 시장가격과는 차이가 있다며 담합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또 LPG의 수입가격,세금, 적용되는 환율 등을 감안할 때 실제 가격을 조정할 수 있는 여지는 전체 가격의 8% 안팎에 불과해 가격을 담합할 여지도 없었다고 강조했다. 업계는 현실이나 관행을 지나치게 무시하고 공정위가 몰아치기식 조사를 통해 막대한 과징금을 물리려 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게다가 정호열 공정위원장이 최종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국정감사에서 "1조원의 과징금이 나올 수도 있다"고 밝히면서 전원회의 위원들이 부담을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전원회의에 참석하는 한 위원은 "집행당국의 수장이 담합에 대해 공개적인 언급을 하는 바람에 독립적인 기준으로 사안을 판단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리니언시도 검증 필요

공정위의 카르텔 규제가 늘어나다 보니 기업들 사이에서는 담합이 확실치 않은 경우에도 '혹시나'하는 생각에 미리부터 겁을 먹고 공정위에 리니언시 신청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번 LPG 건이 대표적인 예다. 한 경쟁법 전문 변호사는 "이런 것을 두고 '보험성 리니언시'라고 하는데 업계 내부에 갈등만 빚어져 정책목표인 시장의 건전질서 정착에도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우려했다.

경쟁 기업을 견제하는 도구로 리니언시를 이용하는 경우도 눈에 띈다. 공정위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대상으로 휴대폰,냉장고 부문의 담합을 둘러싼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역시 리니언시가 발단이 됐다"고 밝혔다. 두 회사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리니언시 제도를 통해 상대 기업에 '과징금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가 섞여 있다는 것이 공정위의 해석이다. 미국의 경우 리니언시를 신청한 기업에 대해 거짓정보 제출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진술을 철저하게 검증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한국은 아직 그렇지 못해 리니언시 제도가 악용될 소지가 크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리니언시 제도=사전적 의미로는 '관대한 처분'이라는 뜻.담합 혐의가 있는 기업 중 먼저 자백하는 기업에는 죄를 묻지 않거나 줄여주겠다는 조건으로 카르텔 내부의 고발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다. 공정위는 1순위로 자진 신고하면 100%,2순위로 신고하면 50% 수준의 과징금을 면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