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힘으로 멀리 날아가게 하는 게 티샷이고 퍼터로 홀아웃하게 하는 데 필요한 건 정확도야.이게 기업에서는 매크로와 마이크로야." 16년 전 골프를 기업경영에 빗댄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발언이다.

이 전 회장은 무척 과묵한 편이다. 과거 사장단 회의에서도 의례적인 인사나 불필요한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나오는 짧은 칭찬과 질타에 사장단의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1993년 이 전 회장이 중역들을 모아놓고 얘기를 쏟아내는 모습을 비디오로 보면 '과연 이 사람이 이건희 회장인가'싶을 정도로 다변에 달변이다. 삼성 경영과 제품에 대한 내부 비판으로 출발해 세계경제의 흐름을 엮어내고 역사와 인문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까지 곁들이는 얘기의 흐름은 현란하기 짝이 없다. 당시 발언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이 전 회장을 만나본 사람들이 왜 "탁월한 선견력을 가졌다"고 평가하는지 알 수 있다.

우선 이 전 회장이 삼성 내 조직 이기주의를 없애야 한다며 한 얘기의 한 토막."GM 포드 등 메이저 자동차들이 인류에 대한 죄악을 저질렀어.엔진구조가 나오고 나서(개발한 후) 기름 안 쓰고 수소를 쓰는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렸단 말이야." 1920년대 GM이 자동차판매 확대를 위해 전기철도 등의 운송회사를 사들인 후 폐업을 해버린 행태를 꼬집는 말이었다. "메이저들이 지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한 것이지만 오그라질 발상이다. 그래서 도요타에 진 거야.수소 LNG 이런 거 쓰는 거 더 개발했으면 좋았을 텐데 결과적으로 제 모가지 제가 찌른 거야.자동차업체들의 이런 집단 이기주의가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는데 아무도 분석할 생각을 안 해." 결과론이지만 지금 GM과 포드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고 도요타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 나가는 친환경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최근 삼성 내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소프트 경쟁력에 대한 언급도 눈길을 끈다. "앞으로는 소프트 싸움이야.진짜 여러분이 좋아하는 놀고 쉬는 일,그걸 해라 이말이야.여행,레저 이게 일이야.진짜 한번 놀아봐.출근부 도장 찍는 짓 그런 거 하지마.없애 버려.집에 있으나 회사에 있으나 별 차이 없어." 삼성이 최근 시작한 장기 휴가제와 유연 근무제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이어 "좀 과장하면 앞으로 디자인이 가장 중요해져.다품종 소량생산 개성화로 가는 거야.디자인,설계 이런 건 갑자기 앉아 있다가 생각나는 거야.책상에 만날 앉아 있다고 되는 게 아니야.자율에 맡겨봐.내가 잘 알아.그렇게 해야 경쟁력이 생기는 거야"라고 강조했다.

지배구조 문제도 언급했다. 그는 "전문경영인이 낫다,오너경영인이 낫다 이런 거 다 우스운 얘기다. 경영 잘하는 사람이 좋은 거다. "

이 전 회장은 또 국제화에 대해선 "국제화 안할 수가 없어.해야 돼.우리나라 4000만명이 먹고살려면 수출 안 하면 안 되게 돼 있어.그러려면 개방해야 돼.이거는 국민학교 1학년 산수야,산수"라고 강조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