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한화석유화학 대림산업 삼남석유화학 금호P&B 등 화섬업계 11개 노조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화섬연맹으로부터 대거 제명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화섬연맹에 조합비를 6개월간 납부하지 않은 게 제명 이유다. 이들 노조가 조합비 납부를 거부한 것은 화섬연맹이 일반적인 노동운동의 틀을 벗어나 정치적 성향을 띠는 데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다.

여수산업단지 B사의 C노조위원장은 "금속노조와 화섬연맹,화섬노조 간에 제조산별노조로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너무 정치적으로 변질되는 것 같아 11개 노조가 집단으로 조합비 납부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노조가 무턱대고 떼를 쓰는 시대는 지났다"며 "이제 조합원들은 정치적 · 이념적 투쟁 대신 고용안정과 복지개선을 더 희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11개 노조가 민주노총에서 제명당하면서 해당 기업의 노사관계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D사 관계자는 "자의든 타의든 우리 회사 노조가 민주노총에서 제명당한 뒤 노사문화가 바뀔 조짐을 보이고 있다"며 "무엇보다 파업 증후군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조합원들의 반응도 비슷하다. H사의 한 노조원은 "처음에 제명당할 때는 조금 걱정도 했는데 지금은 민주노총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할 정도"라며 "고용안정과 복지후생 개선이 조합원들의 최대 관심사"라고 말했다.

이처럼 민주노총의 정치성향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단위 노조에서도 정치성 탈피를 촉구하는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현대자동차 노조에서는 정치 · 이념투쟁을 비판하고 합리적 운동노선을 추구하는 모임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낮은 소리들의 모임(낮소모)','길을 아는 사람들'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모임은 유인물 등을 통해 노조 간부의 비리,간부 중심의 독선적 활동 등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낮소모에 참여하고 있는 최병협 우리사주조합장은 "조합원들은 많이 변해 이제 정치투쟁에 별로 관심 없다"며 "정치집단화된 활동가와 노조집행부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비판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년 노조의 폭언과 불법파업에 시달려온 S중공업에서도 변화의 분위기는 역력하다. 경영진은 노조의 달라진 모습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불법파업이 없어졌을 뿐더러 노조가 경영자에게 가하던 폭언과 폭행도 사라졌다"며 "금속노조에서 파업지침이 내려와도 '무조건 돌격앞으로'는 없고 회사 사정을 고려하면서 행동한다"고 말했다.

현장이 변하면서 민주노총의 정치파업 건수도 크게 줄고 있다. 지난 2006년만 해도 1년간 15차례에 걸쳐 한 · 미 FTA협상 저지,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 쟁취,노사관계민주화입법 쟁취 등을 이슈로 내걸고 정치파업을 벌였다. 민주노총의 정치파업은 2007년에는 다섯 차례로 뚝 떨어졌고,지난해에는 단 한 차례에 그쳤다. 올해에는 아직 한 건의 정치파업도 없었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도 지난 4월 기자간담회에서 "노동운동가들이 이성적으로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다. 총파업을 벌일 분위기가 아니다"고 말해 노동현장의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경제학)는 "현장 조합원들은 자기 이익과 관련없는 이슈를 내걸고 집행부의 결정으로 벌이는 정치파업에는 관심이 없다"며 "지난해 시작된 경제위기 등을 겪으면서 한국의 노동운동은 실리주의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울산 · 창원 · 여수=윤기설 노동전문기자 upyk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