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전 경제부총리(서울대 명예교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보이지 않는 손(시장원리)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며 "앞으로는 보이는 손(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라고 18일 말했다. 조 전 부총리는 이날 서울 반포동 JW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세계미래포럼(이사장 이영탁) 조찬강연에서 "경제는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이 각각 제 역할을 할 때 제대로 된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조 전 부총리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폭이 과거보다 넓어지고 있다며 금융위기를 계기로 자본주의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각국 정부가 자국민의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서 보호무역 조치를 취하는 것 등이 이미 정부가 개입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앞으로는 경제 정책에서 복지 등 사회 정책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며 "이는 불가피한 현상이고 필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한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잘하는 나라는 경제가 발전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경제가 후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정부가 개입하면 잘 된다는 것이 아니고 정부가 옳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정부 개입 확대가 시장원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밝혔다.

그는 정부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이유는 시장원리에 대한 과신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낳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특히 금융업에 대한 규제 완화가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규제 완화가 금융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실 금융자산을 양산해 위기의 불씨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금융 부문은 시장에만 맡겨두면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했다.

조 전 부총리는 세계 경제 전망과 관련,"과거와 같은 호황은 올 것 같지 않다"며 비관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는 "최근 미국 경제가 회복되고 있다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며 "실업률도 10%에 근접한 수준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고 양극화 문제도 해소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유동성 공급에 의존하다가 무너진 경제를 더 많은 유동성을 공급해 살리겠다는 것은 말 자체의 모순이고 상식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금리 인하와 재정 확대에 의존한 세계 경제 회복세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조 전 부총리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한국은행법 개정과 관련,"금융에 관한 것은 중앙은행이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며 한은의 역할에 금융안정 기능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중앙은행은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이견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날 강연은 당초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가 할 예정이었으나 총리로 지명되면서 은사인 조 전 부총리가 대신하게 됐다. 조 전 부총리는 제자인 정 총리 후보자에 대해서는 "비록 제자라고는 하지만 어떤 정책을 펼치라는 식의 제언을 할 입장은 못 된다"며 말을 아꼈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