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물가안정을 이유로 설탕의 관세율을 낮추는 방안을 추진,제당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정부 일각에서 현재 40%인 설탕 관세율을 인하하는 방안을 검토하자 제당업체들은 산업 기반이 붕괴된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CJ제일제당,삼양사,대한제당 등 제당업체들은 세계 각국이 설탕 산업을 식량 안보 차원에서 보호하고,오히려 관세장벽을 높이는 분위기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덤핑수출 장본인 EU도 관세율 260%

밀가루 등 다른 식품소재와 달리 유독 설탕에만 고율의 관세가 적용되는데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밀 1.8%,밀가루 4.2%,대두 3.0%,대두유 5.4% 등으로 대부분 관세율이 낮다. 하지만 원재료인 원당은 3%(현재는 한시적 무관세)인데 반해 설탕 완제품은 40%(한시적으로 35% 할당관세)의 관세가 붙는다.

가장 큰 이유는 국제 설탕시세를 좌우하는 EU(유럽연합)의 설탕 덤핑수출 탓이다. 세계 최대 사탕무 생산지인 EU는 역내 농민 보호를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주면서 역내 가격의 반값 수준으로 설탕을 해외 시장에 밀어내고 있다. 지난해 9월 기준 EU 역내 설탕 가격은 t당 780달러인데 반해 수출가격은 400달러에 불과하다. 따라서 세계 각국이 설탕에 대해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은 EU의 덤핑 공세로부터 자국 제당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수단'의 성격을 띠고 있다. 미국의 설탕 관세율이 125%이고,일본은 한국보다 8배나 높은 314%로 사실상 수입을 원천봉쇄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덤핑 수출의 장본인인 EU조차도 수출된 물량이 역내 시장에 되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260%의 높은 관세 장벽을 치고 있다.

홍성규 건국대 교수(농경제학)는 "설탕 국제 시장이 덤핑으로 얼룩져 있는 상황에서 한국만 먼저 나서 관세를 인하한다면 스스로 '안전판'을 풀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 국내 제당업체들은 관세율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덤핑 물량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게 돼 사업을 접어야 할 판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무관세 홍콩이 한국보다 비싸

관세를 낮추면 설탕 가격이 내려갈 것으로 기대하는 게 상식이지만 해외 사례를 보면 이런 상관관계가 무조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시민모임의 조사 결과,설탕을 무관세로 수입하는 싱가포르와 홍콩의 설탕 가격(지난해 8월)은 3㎏ 기준으로 각각 7899원과 5135원으로 한국(3270원)에 비해 크게 높았다. 이들 나라에선 월마트 등 유통업체들이 국제 설탕 시세 급등에 따른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높은 마진을 붙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 원당시세가 30년래 최고 수준으로 치솟자 '설탕 안보론'도 대두되고 있고 시리아와 인도네시아가 지난해 이후 100만t 정제 설비를 확보한 것을 비롯,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이집트 알제리 중국 등이 국가 주도로 설탕 정제시설 확충에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 세계 각국이 자국 제당산업 발전과 보호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관세율 인하와 같은 제당산업에 커다란 파급 효과를 낳는 정책에 대해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오고 있다.

국내 설탕값은 프랑스의 절반 이하

제과 · 음료 · 제빵 등 설탕을 원료로 사용하는 가공식품업계는 관세율을 낮춰 설탕값이 떨어지면 관련 식품 물가도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물가 추이를 보면 이 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1998년 물가를 100으로 했을 때 지난해 설탕 가격지수는 88로 10년 새 12%가량 떨어졌다. 반면 과자 · 사탕류는 151로 50% 이상 올랐고,음료와 빵 가격도 각각 27%,24%씩 상승했다. 제당업체 관계자는 "과거 10년간 설탕 가격은 원당 가격 추이에 따라 10번 인하,6번 인상을 반복해 결과적으로 10년 전보다 10% 이상 내려간 상태"라며 "반면 과자 빵 등 가공식품 가격은 오르기만 했을 뿐 한번도 내린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또 국내 설탕 가격은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라는 게 제당업계의 주장이다. 한국소비자보호원의 지난해 6월 조사 자료에 따르면 국내 설탕 가격은 조사 대상 12개국 중 11위였다. 프랑스의 절반 이하이고 중국보다도 가격이 낮았다.

윤성민 기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