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30일 KAIST 본관 회의실에서는 'KAIST 발명 아이디어 경진대회' 시상식이 열렸다. 학생과 교수들이 출품한 202개 제안 가운데 10건의 아이디어가 수상작으로 선정돼 수상자들은 1억5000만원이 넘는 상금을 받았다. 후한 상금과 개발자들의 창의적 아이디어가 어우러진 이 대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KAIST가 올해도 이 대회를 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문제는 이 대회의 후원자가 다름 아닌 세계적인 특허괴물(patent troll)로 불리는 인텔렉추얼 벤처스(Intellectual Ventures,이하 IV)였기 때문이다.

상품 제조는 하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특허를 사들여 기업들과의 협상을 통해 천문학적인 사용료를 받아가는 특허전문회사들이 국내에서 어떻게 특허모집 활동을 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타깃이 된 국내 기업

국내에 특허괴물의 실체가 제대로 소개된 것은 2년 전인 2007년 8월.특허청은 노키아 삼성전자 LG전자 등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 수억달러의 로열티를 챙긴 인터디지털과 같은 특허괴물이 국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는 자료를 냈다. 특허청은 당시 "인터디지털은 삼성 및 LG전자와 싸우기 위해 2005년 468건의 특허를 국내에 출원했다"며 "다른 특허괴물들도 국내에서 특허를 매집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대책이 요구된다"고 경고했다.

이 같은 경고는 2년이 지난 후 재앙처럼 현실화됐다. 인터디지털 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 중인 IV가 국내 기업들에 수조원의 사용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250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특허전문회사도 기업들을 괴롭히고 있다.

한 대기업 특허담당 임원은 "일주일에 한 건 정도는 특허사용료를 내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 그동안 제품 판매대수에 사용료를 곱한 천문학적 금액을 요구하는 회사들도 있다"고 말했다. 전자산업진흥회 특허지원센터 관계자는 "삼성전자와 LG전자만을 상대로 이들이 요구하는 금액만 16조5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 특허관련 단체인 '페이턴트 프리덤'에 따르면 특허괴물들로부터 가장 많은 소송을 당한 회사는 삼성전자로 2004년 이후 38건에 이르고 마이크로소프트,모토로라,HP,소니,LG 등이 그 뒤를 이었다.

전자 업체 관계자는 "미국에서 비공식적인 집계가 38건이지 실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특허 관련 소송은 더욱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특허전문회사뿐만 아니라 제조업체로서 개발한 특허를 생산활동에 이용하지 않고 '돈벌이'로만 활용하는 'NPE(Non Practicing Entity)'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하니웰이 대표적인 사례로 이 회사는 몇 년 전 자사가 갖고 있는 PDP 특허를 생산에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PDP 생산기업들을 공격,파문을 일으켰었다.

김앤장의 백만기 변리사는 "생산활동을 하는 기업들 간의 특허분쟁은 서로의 유리창에 돌을 던져 깨뜨려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조정이 가능하지만 이런 특허전문회사들은 거칠 것 없이 공격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기업들,트롤 잡는 트롤까지 동원

국내 기업들은 이 같은 특허전쟁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최근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특허전문회사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들에 맞서고 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트롤 잡는 트롤로 불리는 회사들이 최근 미국에 생겨났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도 이들 회사에 회원으로 가입하거나 파트너십을 형성해 대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기업이 가입한 '트롤 잡는 트롤'은 AST와 RPX 등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 회사는 회원사들로부터 연회비나 가입비를 받아 세계시장에 매물로 나오는 특허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미래에 발생할 특허분쟁을 사전에 방지해주는 역할을 한다. 한 전자업체 관계자는 "최근 이 회사를 통해 두세 건의 특허관련 분쟁을 처리할 수 있었다"며 "새롭게 설립된 특허회사에도 회원으로 가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가 최근 5년 새 200여명이던 특허관리 인원을 500여명으로 늘리고 LG전자도 매년 조직을 확대하는 등 특허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특허를 매입할 수 있는 펀드를 조성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에서 논의되는 것처럼 국내에서도 특허권 남용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국기업들은 '봉'

담합이든 특허든 소송만 당하면 미국 로펌으로 달려가는 기업들의 행태도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해외에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삼성과 LG를 공격해 돈을 벌고 있는 곳은 특허 괴물뿐만이 아니다. 미국 로펌들에도 건당 수백만~수천만달러에 이르는 수임료를 내는 한국 기업들은 큰 고객일 수밖에 없다. 사실 제조업으로 5억~6억달러를 버는 건 어렵지만 소송에 걸려 그 정도 날리는 것은 순식간이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의 법과 제도에 두루 밝은 한국로펌을 이용할 경우 훨씬 저렴한 경비로 높은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도 좀처럼 국내 로펌에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며 "해외 로펌이 한국기업들 편에 서서 승소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고 꼬집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