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업은 부침이 심해 대표적인 '벤처' 사업으로 일컬어진다. 초대형 베스트셀러 한 권만 내면 고층 빌딩도 살 수 있다는 대박신화를 좇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회사가 바로 출판사다. 현재 국내에 등록된 출판사 수는 1만3000여개.이 중 연간 1권 이상의 책을 펴내는 곳은 절반에 불과하다. 흑자를 내는 회사는 20%도 안 된다. 국내에서 창립한 지 50년이 넘은 출판사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것도 낮은 진입장벽으로 과잉경쟁이 이뤄지면서 수익성이 낮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창립 64주년을 맞았던 현암사는 유구한 역사 위에 한 가지 전통을 보태고 있다. 올해 초 조미현 대표(39)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3대가 가업을 잇는 국내 유일의 출판사가 됐다. 조 대표는 조근태 회장(67)의 2남1녀 중 맏딸이면서 창업주 고(故) 조상원 회장의 손녀다.

현암사는 1945년 대구에서 '건국공론사'란 시사월간지로 출발했다. 1912년생인 고 조상원 회장은 초등학교 졸업이 정규학력의 전부였지만 15세에 보통문관시험(현재 7급 공무원시험 상당)에 최연소 합격했을 정도로 수재였다. 해방 직후 그는 대구일보에 취업했으나 기자가 아닌 영업부로 발령나자 몇 달 만에 사표를 내고 직접 잡지사를 차렸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대구일보에 비슷한 시기에 입사하고 퇴사한 동기였다. 건국공론사는 1949년 한국공론사를 거쳐 1951년 현암사로 사명을 바꿨다.

일본 사람의 집을 사들여 잡지사를 창간했지만,사업면모를 갖추기까지는 수년의 세월이 걸렸다. 종이가 귀했던 시절인지라 마분지(馬糞紙)로 만든 월간지는 인쇄상태가 열악했고,이마저도 제대로 구하지 못해 계간지로 발행하기 일쑤였다. 집에 돈을 벌어다 주기는커녕 부인이 부업으로 모은 쌈짓돈을 끌어다가 출판사 운영에 보탰을 정도였다.

창업주는 "이왕이면 큰 물에서 놀아보자"며 적산가옥을 처분,서울 삼청동의 56㎡ 한옥에다 출판사를 차렸다.

1951년께 창업주가 직접 편역한 처세술 관련 도서 '처세철언'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서며 빚도 갚고 사업의 숨통도 트였다. 이어 1959년에는 한국 최초의 '법전(法典)'이란 제호로 대한민국 법령집을 펴냈다. 법전은 현재 52판이 출간됐고,아직도 현암사 하면 법전을 떠올릴 정도로 대표도서가 됐다. 고 박경리 선생의 '시장과 전장',황석영의 '장길산' 등 주옥 같은 명저를 비롯해 현재 서점에서 판매되는 현암사 발간도서가 250여종에 달하지만,아직도 법전 관련 도서는 현암사 총매출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반짝' 팔리고 마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수명 긴 책을 펴내면서 출판업계에 한 획을 그었던 현암사는 1980년께 최대 위기를 맞았다. 사운을 걸고 매달렸던 '육당 최남선 전집'이 2년여 동안 출간이 지연되면서 10억여원의 빚을 지게 된 것.책을 펴내는 본업보다는 매일 돌아오는 어음을 결제하느라 진이 빠진 창업주는 1981년 아들 조근태 회장에게 대표이사직을 넘겼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69년에 입사,창고업무와 교정 영업 등을 두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아온 조 회장은 당시 선친이 피를 토하듯 했던 말을 아직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내 힘은 여기까지다. 망해먹든지 말든지 너 마음대로 해봐라"며 아들에게 인감도장을 건넨 것.

갑작스럽게 대표이사직을 맡은 조 회장은 빚에 허덕이는 회사를 경영하려고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고의도산을 내 '빚잔치'를 한 후 다시 회사를 정상화시키라는 주위의 조언도 있었지만,창업주는 "차라리 사업을 접으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가 회사 채무를 모두 청산하는 데 꼬박 1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조 회장은 대표이사 취임 후 사장이 기획에서 출판 영업 편집까지 책임지던 부친의 경영방식에 변화를 불어넣었다. 그는 "최고경영자의 덕목은 일 잘하는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로 결정된다"는 지론을 폈다. 출판업무의 분업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출판업계의 거친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조 회장은 당초 가업을 자녀에게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1남2녀의 자식들은 모두 출판업과 무관한 미술대학에 진학시켰다. 맏딸인 조미현 대표는 1996년 이화여대 섬유예술과 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교수의 꿈을 품고 곧바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때까지만 해도 맏딸의 결정을 존중했던 조 회장은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미국 보스턴대학원에 입학한 맏딸에게 전화를 걸어 귀국을 종용했다. 그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외환위기로 직원 월급도 못 주는데 딸 유학비를 보낼 수 없다'는 것.하지만 더 큰 이유는 현암사를 100년 기업으로 발전시킬 적임자가 조 대표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조 회장이 곧바로 송금을 중단했는데도 불구하고 맏딸의 저항은 거셌다. 아르바이트 등으로 6개월을 버틴 조 대표는 1998년 부친을 설득해 다시 유학길에 오를 작정으로 일시 귀국했다. 조 회장은 "교수보다 사장이 낫다"는 말로 설득하며 영업부로 즉각 배치했다. 조 회장은 영업부 출근 첫날 자신의 자가용에 동승하기 위해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는 딸에게 "일개 영업사원이 왜 사장차를 타려느냐"며 혼쭐을 냈다.

이후 조 대표는 영업부에서 적응할 만하면 소매,도매,지방사업부로 연이어 발령받아 일하면서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았다. 잠시 근무하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4년여 세월이 훌쩍 흐르면서 조 대표는 출판업에 인이 박혀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2004년 부친의 동의 아래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자신의 전공인 미술이 아닌 뉴욕대학의 출판학 석사과정을 밟기 위해서였다. 2년6개월에 걸친 유학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상무를 거쳐 올 1월 경영권을 물려받은 조 대표는 자신의 역할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100년 가업을 자신의 대에서 완성하는 것은 물론 국내 최고 장수 출판기업으로서 초석을 다져가는 일이다.

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