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양은 많은데 내용이 없어.어라 이건 또 뭐야? 다시 고쳐와!"(호통)

부하:"부장님이 지시한 내용이 명확하지가 않아서 그런 건데…."(불만)

업무용 보고서를 잘 쓰기로 정평이 난 삼성이 '보고서 혁신'에 나섰다.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비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상징으로 보고서를 지목한 것이다.

삼성은 14일 전계열사로 송출된 사내방송을 통해 현행 보고서 문화의 문제점과 개선책을 내놨다. 방송에 따르면 삼성이 인력개발원을 통해 파악한 직원들의 보고서 작성 건수는 평균 1주일에 세 건 정도였다. 한 건 작성에 투입되는 시간은 평균 2시간30분.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고도 만족스러운 내용을 담을 확률은 극히 낮다는 게 방송의 요지였다. 작성 기술의 문제라기보다는 보고서가 쓰여지는 경로에 문제가 있다는 진단도 덧붙였다.


◆소통방식을 바꿔라

삼성의 이번 캠페인이 '한 장으로 압축하는 것'과 '한자(漢字) 병기'를 양대 축으로 하는 기존 보고서 작성 틀을 깨자는 것은 아니다. 보고서의 핵심 콘텐츠가 제대로 공유되고 전파될 수 있도록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변화를 주자는 취지다.

방송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공룡과 쥐의 관계를 들었다. 과거 거대한 포식자인 공룡이 쥐 때문에 멸망했다는 학설이 나오고 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공룡은 몸이 거대하고 신경조직이 발달하지 못해 꼬리부터 점령해오는 쥐에 꼼짝없이 당했다는 것.거대한 기업에서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는다면 공룡처럼 몸의 한부분 한부분이 떨어져나가 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한장'의 요건

보고서의 적정 분량은 어느 정도일까. 삼성이 내놓은 답은 여전히 '한 장'이다. 세계 최고의 마케팅 기업으로 손꼽히고 있는 P&G가 이미 1930년대부터 시행하고 있는 보고서 작성 원칙이기도 하다.

삼성은 대표적인 사례로 삼성SDS가 운영하고 있는 멀티캠퍼스의 교육과정인 '원 페이지 프로포절(one page proposal)'을 들었다. 추진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둘러싼 모든 사실과 추론,실행과정까지 설득력있는 언어를 사용해 한장에 담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삼성은 보고서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향후 보고서 작성을 위한 세 가지 가이드라인도 제시했다. 간결하게 작성하고,첫장에 핵심을 요약하고,개성있는 스토리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오래 전부터 '가장 뛰어난 보고서는 한 장짜리'라는 얘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다"며 "이는 보고서의 수요자들인 의사결정자들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바쁜 임원들이 보고서 한 장으로 모든 것을 파악해 결정할 수 있도록 하되,스토리를 담아 설득력을 높이라는 설명이다. 과거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보고서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던 국정원 보고서도 대부분 한 장짜리로 알려져 있다.

◆"보고서는 자신의 분신"

삼성은 보고서의 달인으로 두 사람을 소개했다. 2008년초 '금리차 밸류에이션 조정으로 장세 폭발'이란 제목의 두 장짜리 보고서로 억대 연봉을 제안받은 D증권사 애널리스트와 삼성물산의 김광일 상무였다. 김 상무는 방송 인터뷰에서 "보고서는 독창성과 차별성이 있어야 하며,작성자는 보고서를 분신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창의적인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평소에 일기쓰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방송은 또 이용갑 미래경영연구소 소장을 통해 좋은 보고서의 조건인 '결근방기(結根方期)'도 소개했다. 결론부터 말하라,근거를 확보하라,방법에 확신을 가져라,기대효과를 명확히 하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