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살고 싶은 세계적 모범도시''장벽 없는 생활하기 편한 도시''품격 높은 문화 · 정보도시'….

지난달 25일 오후 충남 연기군 금남면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홍보관.세련된 인테리어를 배경으로 온갖 말의 성찬이 이어져 있었다. 행복도시의 미래 모습을 담은 미니어처 또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행복도시'의 미래상은 홍보관에나 존재하는 게 아닐까. 여러 정황들을 생각하면 홍보관의 현란한 문구들은 오히려 심란하다.


#우울한 시나리오

2015년 한 외국인이 세종시를 찾았다. 2006년 세계 최고의 명품도시를 만든다는 비전 아래 시작된 도시 계획에 참여했던 인물.하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광경은 눈을 의심케 했다.

인구 50만명급 도시지만 터를 잡고 사는 주민은 공무원 1만2000명과 가족,음식점,인쇄소,소매업소 직원 등 고작 5만여명.밤이면 환하게 불을 밝힌 가로등 사이로 어둠에 둘러싸인 아파트단지가 적막 같은 실루엣으로 남는다. 단신으로 내려온 공무원이 많아 자전거 트랙과 놀이터에도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는 없다.

도시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녹지와 공원은 밤마다 서울에서 내려온 '폭주족'의 일탈 공간으로 둔갑하곤 한다. 날이 밝으면 공원 곳곳에 버려진 술병들과 쓰레기로 '명품도시'는 몸살을 앓는다. 기업과 연구소를 유치하기 위해 닦아 놓은 거대한 부지는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간이건물을 빼고는 텅 비어 있다.

서북쪽으로 30분 거리인 오송역에 KTX가 정차하지만 평일엔 이용 승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최대한 자연미를 살려 디자인한 골프장은 지역 유지들의 사교장이 된 지 오래다.

공무원들의 얼굴에도 활기가 없다. 인구와 기업이 모자라 시의 세수(稅收)는 늘 빠듯하다. 상시적으로 보수해야 할 가드레일과 순환도로들도 파손된 상태 그대로 방치돼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매사를 이런 식으로 비관할 필요는 없겠지만 홍보관의 비전과 척박한 현실 사이의 간극은 메울 길이 없어 보인다. 이대로 간다면 '21세기 한국의 심장부'가 될 세종시가 '도시괴담'의 진원지로 자리잡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앞서 취재팀이 제시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기업 연구소 대학 등의 '패키지 이전'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행정부 이전만으로는 제대로 된 도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제로 세종시에 터를 잡겠다는 기업이나 대학은 KAIST 정도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없다. 누가 앞장서서 유치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전 대상인 행정부처 공무원들조차 이전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물론 현실화될 가능성도 낮게 보고 있다. 2013년 이전 계획이 잡힌 한 정부부처 기획실장에게 청사 이전에 대해 묻자 "왜 우리가 내려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종시의 법적 지위를 규정할 관련 법안은 국회에서 수개월째 잠자고 있고,정부 이전을 위한 변경고시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공무원 1만2000명조차 세종시로 들어갈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헷갈리는 정부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현 정부 출범 이후 노무현 정부 시절 대못을 박아 놓은 행정수도 이전이 백지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행정부 이전을 막을 것이라는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청와대와 정부는 표면적으로 '계속 추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적절한 명분과 타이밍이 주어지면 정부청사 이전 계획을 전면 손질한다는 속내를 갖고 있다. 전면 백지화 내지는 일부 부처만 이전시키는 방안도 내부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행정수도 이전을 철회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야당의 극력 반대와 충청권의 반발 등과 같은 현실적 장벽 탓이긴 하다. 야당이 "다른 것은 몰라도 행정부는 무조건 옮겨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여기에 내년 6월로 다가온 지방선거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현 정부 입장에서 세종시 건설문제는 조기 결단과 용기의 문제다. 눈치를 보며 시간을 끈다고 좋은 해법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비록 전 정권이 시작한 사업이라 할지라도 이미 6조원 가까운 혈세가 투입된 사업을 이런 식으로 방치하는 건 현 정부에도 큰 문제가 있다"며 "행정부를 이전하지 않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도시 건설과 지역 발전 솔루션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충남 연기=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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