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여행객들은 앞좌석 뒤편에 붙어 있는 주문형 오디오비디오시스템(AVOD)을 통해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즐기며 지루하지 않게 보낼 수 있다. 이 디스플레이의 핵심부품은 손가락의 압력을 인식할 수 있는 터치패널.이 같은 항공기용 터치패널은 터치패널연구소라는 일본의 중소기업이 전 세계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도쿄 하치오지(八王子)시에 있는 이 회사는 생산시설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40여명의 임직원은 연구개발(R&D) 및 품질관리만을 담당하며 모든 생산은 대만에서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으로 이뤄진다.

미타니 유지 대표는 "지난 4~5년간 항공기용 터치패널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회사도 급성장했다"며 "11년 전 회사 설립 이후 꾸준히 기술개발에 집중해 제품을 업그레이드해 온 결과 지난해 12억엔(약 14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고 말했다. 항공기용 터치패널은 겉으로는 단순해 보여도 조종장치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전자파를 발생시키지 않아야 하고 화재시에도 타지 않는 특수소재로 제작돼야 하는 등 까다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미타니 대표는 "항공기용 터치패널은 요구사항이 많은 반면 수요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대기업은 뛰어들 수 없는 시장"이라며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 후 R&D에만 집중한 것이 맞아떨어졌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터치패널연구소가 혼자 힘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수년간 정부의 보조금을 활용해 세부기술들을 개발했다. 지난해에는 하치오지시가 지급하는 800만엔(약 1억원)의 R&D 보조금을 받았으며 올해에는 여러 곳의 자극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멀티입력 터치패널 개발에 도전하기 위해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1억엔(약 13억원)의 보조금을 신청할 계획이다.

일본 정부의 중소기업 R&D 자금지원의 기본틀은 '선택과 집중'이다.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급하는 보조금의 대부분은 터치패널연구소와 같은 부품 · 소재기업에 집중돼 있다. 금형,단조,전자부품,동력전달 등 20개 제조기반기술을 선정하고 이들 분야에 R&D 보조금을 집중적으로 투입한다. 무라카미 다카마사 일본 중소기업청 창업기술과 총괄반장은 "선정된 20개 분야는 중기만이 잘할 수 있는 분야,중기가 강점을 가진 분야,대기업이 대체할 수 없는 분야"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선택과 집중 전략은 일본의 25만개 중소제조업체 중 약 5만개를 '모노쓰쿠리(세계적인 수준의 기술을 갖춘 제조업체)'로 길러냈다. 터치패널연구소뿐만 아니라 무선 인체 내시경 카메라의 세계시장 85%를 점유하고 있는 알에프,휴대폰 고화소 카메라 생산량의 14%를 점유하고 있는 이토전자공업,특수쐐기 원리를 응용해 느슨하지 않은 나사를 개발한 하드록공업 등 중소기업들도 정부의 R&D자금을 지원받아 성장한 회사들이다.

일본은 최근 한발 더 나아갔다. 지난 4월10일 긴급경제대책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추경예산 10조원을 편성하고 이 가운데 700억엔(약 1조원)을 이들 20개 분야에 지원하기로 한 것.700여곳의 기업에 1억엔(13억원)씩의 보조금을 지급하며 이들 기업에는 판로개척까지 지원할 계획이다.

올해 우리나라 중기청이 집행하는 중기 연구개발 보조금은 4780억 원으로 경제규모를 감안할 때 작지 않다. 그렇지만 신약개발부터 에너지,녹색기술에 이르는 백화점식 지원에 나서는 탓에 뚜렷한 성과가 부족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 R&D 유인책으로는 일부 선진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조세환불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의 R&D 투자액 가운데 일정비율(25%)을 세금에서 감면해주는 세액공제 제도를 운영 중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중소기업이 이익이 발생하고 실제 납부할 세액이 있을 때만 혜택을 받는다. 이익이 발생하지 않아 납부할 세액이 없다면 R&D 투자에 따른 세액공제를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호주는 매출액이 500만 호주달러 이하,R&D 지출 100만달러 이하의 경우 소득공제금액의 일부(30%)를 환불해주고 있으며 영국은 세법상 손실이 발생한 중소기업에 대해 R&D 지출액 100파운드당 24파운드를 되돌려 준다. 캐나다도 소기업(전년도 과세소득 40만 캐나다달러 이하)에 대해 세액공제를 받지 못한 R&D 투자비용을 환불해주고 있다.

도쿄=글 · 사진 황경남 기자 knhwang@hankyung.com
한경·산업기술진흥협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