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전문가들에 대한 평판이 기상 캐스터보다 더 나쁜 이유는 대개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전망이 빗나가기 일쑤여서다. 자연계의 변이 출현과 자연선택이 예측 불가능하게 진행되듯이 경제계의 변화 역시 수많은 스톡과 플로들이 엉켜 복잡하게 전개된다.

여기에다 경제계에는 인식-판단-의사결정 사이에 시간 지체 현상까지 나타난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동태적 복합성이라고 부르는데,증권시세의 특정 사이클이 어떤 경우에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 양상과 같다. 경제위기라는 것도 매순간 위기의 원인과 양상,해소 과정이 모두 다르다.

호황과 불황,위기와 극복 과정은 어떤 사이클의 궤도를 갖고는 있지만 임의적이지도,결코 주기적이지도 않다. 사이클의 상투나 바닥은 지나가 봐야 안다. 증권 투자든 기업 투자든 궁극적으로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마법은 없다.

아래의 <가상 일기>는 경제 흐름을 나름대로 예측하며 의사 판단을 하는 기업들의 행위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변화에 노출돼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동시에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수십,수백만가지 경제행위들이 몰고오는 미지의 세계,참으로 알 수 없는 질서는 두려움과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미래는 감히 예측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해고 통지

오전 8시.사무실 문을 열자 책상 위에 놓인 노란 봉투가 보인다. 드디어 오늘인가. 봉투엔 파산관재인 이름이 또렷하게 박혀있다. "귀하는 2009년 4월1일자로 공장장 직에서 해임처리 됐습니다. 지난 8개월간의 체불급여는 파산절차가 종료됨과 동시에 지급 가능하며 수령절차는…." 나는 해고통지서를 책상에 던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현실로 맞부딪치는 일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그때 조금만 성급하지 않았더라면…." 머리를 감싸쥐고 소파에 기대 앉았다. 지난날의 과오가 회한처럼 기억 속을 떠다니며 괴롭힌다.

#2003년 2월22일,집단 미몽의 시작

D램 생산을 맡고 있는 제조담당 임원이 서류 뭉치를 가져왔다. 1993년부터 D램 세계 1위이자 경쟁사인 삼성전자의 올해 시장전망 보고서다. 삼성은 올해 반도체 시장이 22% 성장한다는 다소 급진전한 전망을 내놓고 있었다. 다른 시장조사기관들이 내놓은 12%대의 성장 예측을 크게 뛰어넘었다.

우리 공장의 재고를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최근 몇 주 사이 재고가 부쩍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가격도 상승 무드에 접어들었다. PC의 주기억장치에 들어가는 256Mb(메가비트) D램 값은 최근 3달러 중반에서 5달러 선으로 40%가량 뛰었다. 수화기를 들어 제조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장 가동률을 100%까지 끌어올리라고 주문했다.

#2004년 6월9일,실리콘 사이클 상승

D램 값이 올라가면서 PC업체들이 닥치는 대로 D램을 사들이고 있다. 5년 만에 PC 교체주기가 다가오면서 PC주문이 늘어나고 있다며 델과 HP의 구매담당 임원으로부터 전화가 쉴새 없이 걸려왔다. 수요 확대와 퇴조가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실리콘 사이클'의 대세 상승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300㎜ 크기의 웨이퍼로 생산라인을 바꾸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도체 원자재격인 실리콘 웨이퍼 크기가 현재 200㎜에서 300㎜로 늘면 생산성이 40% 높아진다. 단가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D램 시장 1위와 2위 업체들은 현금이 풍부해 생산량으로 밀어붙이면 당할 수가 없다. 이대로 가면 내년에는 D램 공급이 올해보다 50%가량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가격 하락에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은 아닌가….이럴 때 참 힘들다. 걱정스럽지만 계획대로 투자를 진행하기로 했다.

#2005년 9월29일,선두경쟁의 촉발

아침 뉴스를 장식한 건 삼성전자였다. 삼성은 경기도 화성에 330억달러에 달하는 메가톤급 투자를 선언했다. 디지털 카메라,휴대폰,PC 등 디지털 기기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메모리 시장이 급속도로 확대된다는 것이 투자 확대 이유였다. 지난 4월 D램 시장 2위인 하이닉스가 ST마이크로와 중국 우시에 D램 합작투자를 하면서 생산량을 늘려나가기로 한 데 대해 과감한 승부수를 띄운 셈이다. 난야,프로모스와 같은 대만의 후발주자들도 증산에 들어갔다. 여기서 밀리면 안된다. 선두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300㎜ 생산라인 도입을 위해 경영위원회를 소집했다.

#2006년 11월 윈도비스타의 그림자

요즘 업계의 화두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내년 1월 선보이는 윈도비스타다. MS가 5년 만에 내놓은 새로운 운영체제를 탑재한 PC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 D램 시장도 덩달아 뛸 것이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는 아예 윈도비스타 효과로 반도체시장이 연평균 14.6%씩 성장한다는 전망을 내놨다. 실적도 부쩍 좋아졌다. 지난 3분기에는 매출이 48% 늘어났다. 올해 말엔 임직원들의 성과금 봉투가 두둑해질 게다. 제조 임원에게 내년 4월께 완공되는 신(新)공장 설립 진행 상황이 어떤지 확인해 봐야겠다.

#2007년 3월4일

신공장 완공을 한 달 앞두고 최고경영자의 호출을 받았다. 반도체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신공장 가동을 잠시 유보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적자가 나더라도 공장을 돌려 현금을 뽑아야 한다. 기대했던 윈도비스타 효과도 없지 않느냐고 다그쳤다. 제대로 답변할 수가 없었다. CEO 역시 솔루션이 없기는 마찬가지."아무래도 투자 결정이 너무 빨랐던 것 같다"며 한숨을 뒤로 하고 사장실을 나왔다. 그런데 호황기 때 손 놓고 놀 수는 없었던 것 아닌가. 쓴웃음이 나왔다.

#2007년 10월15일,치킨게임의 시작

D램 값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했다. 공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간과한 셈이다. 3월만 해도 2.91달러였던 512Mb D램 현물값은 지난 9월엔 1.45달러로 주저앉았다. 신공장은 이제 막 가동에 들어간 상태인데 가격 하락이 얼마나 계속될지 두려워진다. 이 와중에 삼성전자가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공급 과잉 때문에 가격이 내려가고 있는 마당에 삼성이 반도체 설비에 1조4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한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악재는 겹치는 것일까. 일본 엘피다마저 대만 난야와 손잡고 삼성 진영에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대로라면 3분기 적자는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위기가 몰려오고 있다. 돈은 있는 대로 설비에 다 쏟아부었는데 말이다.

#2008년 9월11일,감산…감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대형 거래선에 파는 1Gb D램 값은 1.75달러로 빠져있다. 경쟁사들은 감산에 들어갔다. D램 3위인 엘피다에 이어 대만 파워칩도 감산에 들어갔다. 생존경쟁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리도 하이닉스처럼 노후한 200㎜ 라인 폐쇄에 들어가야 한다. 지난 3분기부터 계속된 적자에 부도설까지 나돌면서 자금 압박이 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미국발 세계 경기침체까지 가세해 손을 쓸 도리가 없다. 제조 임원은 정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다. CEO는 은행장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2009년 1월24일,악전고투의 끝

결국 이렇게 될 것이었단 말인가. 정부에 자금 요청까지 했지만 공장이 돌아가면 갈수록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다. D램 값은 0.81달러로 떨어져 팔아도 손해보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길이 없다. 법무팀에서 법원에 낼 파산신청 서류를 가져왔다. 1만2000명의 직원들이 떠올랐지만 수가 없다. 이를 악물고 파산신청서에 날인을 했다.

돌이켜 보면 잠깐 찾아온 호황에 취해 부나방처럼 뛰어든 것 같다. 나도 상대들도….부침이 심한 반도체업종에 평생 몸을 담았으면서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참 어이가 없다. 이제 남은 일은 파산절차 시작을 돕는 것뿐이다.

김현예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