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는 정치체제의 위기를 부른다. 삶이 팍팍해진 국민들이 결국 책임을 묻는 곳은 정부이고,대개의 나라에서 경제위기가 정치체제의 변혁,정권교체로 이어진다. 10여년 전 아시아 외환위기 때 우리 정권이 바뀌었고,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군부정권의 32년 장기독재 체제가 무너졌다. 태국은 선거개혁 등 획기적인 내용의 신헌법이 만들어져 이후 탁신 정권이 출현한다. '아시아적 가치'를 고집하면서 끄떡없이 버텼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정권도 내부적으로는 심각한 정치적 시련을 겪어야 했다.

오늘날 글로벌 경제위기의 진원지인 미국에서 오바마 정권이 새로 등장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제는 유럽,특히 동구권에 정권교체의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에 따른 '정부붕괴 도미노'다. 연초 아이슬란드를 시작으로 라트비아,체코의 정부가 무너졌다.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그리스 보스니아 등의 정권퇴진도 이미 기정사실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 나라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 경제강국들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칠 것이다.

이런 변화들이 앞으로 세계 정세,세계 경제의 큰 물줄기까지 바꾸게 될지는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많은 나라의 정권 교체가 필연적으로 기존 체제와는 다른 가치와 노선을 추구하는 반작용(反作用)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대세는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식 금융자본주의와 시장원리주의 경제시스템에 대한 부정이다.

흔히들 오늘의 경제위기를 80년 전 대공황(大恐慌)과 비교한다. 대공황 이전 세계경제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자유방임'이었지만,이후의 케인스 경제학 시대에는 정부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다시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을 거치면서 케인스는 퇴색되고 밀턴 프리드먼의 '신자유주의'가 지배한다.

하지만 이상(理想)대로만 작동하는 시스템은 없다. 미국식 금융자본주의 · 주주자본주의는 혁신의 원동력이기도 했지만,형편없는 모럴해저드를 조장하는 허점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입증됐다.

지나친 자유가 문제를 낳으면 그 자유를 통제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것이 반작용의 법칙이다. 신자유주의가 도전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런던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1944년 이후 세계 경제시스템을 떠받쳐온 브레턴우즈체제의 영 · 미식 자본주의가 앞으로 생존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올랐다고 최근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계 금융 · 경제위기 대응책을 강구하자는 그 G-20 회의도 벌써 기존 경제체제 · 시장관행에 대한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양상이다. 기축통화 논쟁을 불러 일으킨 중국은 IMF(국제통화가금) 개혁을 주장하고 있고,영 · 미식 자본주의의 한 축이기도 한 영국은 위기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면서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새로운 자본주의의 정립을 말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영 · 미의 '앵글로색슨형 자본주의'가 세계경제를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고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마당이다. 보호주의 배격에는 다들 한 목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그것도 나라마다 이해가 달라 립서비스에 그치고 말 공산이 크다.

어떤 형태로든 기존 체제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세계 정치 · 경제 구도의 변화는 불가피하고,우리 또한 그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갈 수밖에 없다. 격동은 이미 시작됐다. 눈앞의 위기대응과 극복을 위한 노력도 중요한지만 그것에만 급급하다 보면 정작 큰 흐름을 놓치게 된다. 정신 바짝 차려 세계경제의 질서가 어떻게 재편될 것인지,새로운 경제체제 변화가 어떤 지향점을 향하고 있는지를 조망(眺望)하고 국가경영의 밑그림을 다시 준비해야 더 큰 위기가 닥쳐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지금 그런 '큰 눈'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