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부실 부담..당국.은행 눈치만

금융팀 = 실업의 증가와 부실의 현재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채권금융기관 주도의 기업 구조조정이 갈수록 지지부진해지고 있다.

경기 침체로 기업 부문의 부실이 심화하고 있지만 금융권이 부실징후 또는 부실 판정을 받은 기업의 처리를 미루고 있고 정부와 금융당국의 입장도 명확하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처럼 구조조정이 지체되는 상황에서 경기 불황의 그늘이 짙어지면 경제의 부실이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잠시 힘들다고 경제의 환부를 덮어두면 결국 국민의 세금 부담만 키우게 된다는 것이다.

◇ 구조조정 기준 혼선..은행들 `미적'
22일 금융계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지난 주말 채권은행들에 건설사에 대한 2차 신용위험 평가에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인 C등급을 받게 될 업체들 일부에 대주단 협약을 적용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평가의 대상이 주로 중소업체로, C등급이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건설사가 은행과 협약을 맺고 유동성 지원 등을 받을 수 있는 대주단 협약은 B등급(일시적 자금 부족 기업)에만 적용된다.

만약 은행들이 C등급을 워크아웃에 집어넣지 않고 대주단 협약을 적용, 유동성을 지원하게 되면 부실 구조조정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이미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는 건설.조선사들의 항의도 빗발칠 것으로 예상된다.

채권은행들은 C등급 대상을 인위적으로 줄일 경우 나중에 부실 평가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며 난감해하고 있다.

1차 신용위험 평가에서 B등급과 C등급을 받은 신창건설과 대동종합건설이 D등급에 해당하는 기업 회생절차(옛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바람에 채권은행들은 한차례 홍역을 치렀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문제가 있는 기업들을 어떻게 처리하라는 것인지 헷갈린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당국이 구조조정을 서두를 경우 고용악화를 우려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구조조정에 대한 은행들의 미온적인 태도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A은행은 4월 말까지 마무리하기로 한 44개 대기업에 대한 재무구조 평가와 관련해 아직 담당 기업에 자료 제출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은행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아직 대기업 평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매년 하는 심사인데 올해 특별한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채권단은 지난 1월20일 D등급(부실기업)을 받은 일부 기업의 퇴출을 2개월간 미루는 등 구조조정에 소극적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둘러대고 있지만 부실이 현재화할 경우 은행의 건전성이 악화되고 대손충당금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 "과감한 메스 필요하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기업 구조조정은 채권단 주도로 기업 살리기에 중점을 두고 추진하되 회생 가능성이 없는 기업은 신속히 정리하겠다"고 수차례 밝혔다.

이는 외환위기 때와 달리 기업 부실이 일시에 표면화되지 않았고 경기 회복에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결국 구조조정의 의지가 약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제의 환부를 도려내 불확실성을 제거하기보다 고용과 내수를 위해서 가급적 살려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것이다.

또 선제적으로 워크아웃에 집어넣거나 퇴출을 시켰다가 해당 기업의 반발과 책임 공방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이 은행들의 우려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내년에도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중하위권 대기업과 B등급 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는 상황도 배제하기 어렵다며 장기 불황으로 금융기관과 기업의 부실이 확대되기 전에 과감하고 신속한 구조조정을 해서 살아날 수 있는 기업, 경쟁력 있는 기업에 지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LG경제연구원 배민근 선임연구원은 "정부의 방침이 퇴출보다 부실자산 매입 등을 통한 건전성 제고에 맞춰져 있다"며 "문제는 어느 정도의 퇴출이나 워크아웃 없이 부실 정리가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는 "부실을 덮고 미래로 넘기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금융기관과 기업의 부실을 빨리 걷어내는 것이 성장 궤도로 조속히 복귀해 국민 경제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