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고용과 투자를 확대해 달라는 정부의 거듭된 요청에 경제계가 내놓을 만한 선물 보따리를 찾지 못해 난감해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글로벌 경제상황에서 올해 경영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고 있는데,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으로 급하게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 창출에 나서달라는 채근에 난처한 표정이 역력하다.

이 때문에 경제계는 고용과 투자 확대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국민 눈높이에 맞는 묘수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기업들조차 자칫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성급하게 나섰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살얼음 걷듯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한 전자업계 관계자는 "기업들도 정부의 일자리 창출이나 투자 확대 정책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현재 여력이 없어 어떤 방식으로 호응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 "투자 확대에 고개는 끄덕이지만…" = "계획을 세우는 중이어서 지금 당장 드릴 말씀이 별로 없네요.

"
올해 투자 계획을 묻자 기업 대부분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투자는 기업의 장기 성장과 직결된 부분이다.

따라서 기업의 사활을 걸고 계획을 짜야한다.

하지만, 기업을 둘러싼 환경은 불확실성만 점점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올해 경영은 이른바 시나리오 플랜에 따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할 처지다.

투자보다는 비용절감이 우선인 상황이다.

전자업계를 대표하는 삼성전자마저 지난해 9천억 원이 넘는 영업적자(연결기준)를 냈고, 올해 역시 업황 자체가 매우 불투명한 상황에서 정부의 기대만큼 선뜻 투자를 늘리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8∼29일, 이달 18일 각각 DMC(완성제품)와 DS(부품) 부문 경영전략회의를 열고도 아직 구체적 투자 규모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다.

올해 삼성전자의 투자 규모와 관련,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지난달 기업설명회(IR) 당시의 원론적 답변처럼, "올해 필요한 최소 투자 규모가 3조 원 정도"라는 것이 전부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워낙 경영환경 측면에서 불확실한 부분이 많아 예년처럼 한 해 투자 규모를 뚜렷하게 밝히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경영전략회의에서도 구체적 수치가 확정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LG전자는 투자만큼은 일단 지난해 수준을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LG전자 관계자는 "지난해 연구·개발(R&D)에 1조7천억 원, 설비에 1조2천억 원 정도 투자가 집행된 것으로 보인다"며 "올해 R&D는 작년보다 늘어나는 대신 설비투자가 줄어 전체적으로는 작년과 비슷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이닉스는 업황 회복기를 겨냥, 올해 1조 원에 다소 못 미치는 설비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앞서 지난해 `1조∼2조 원' 범위로 제시했던 투자 규모와 비교해 상당 부분 축소된 것이다.

LG디스플레이는 올해 2조∼2조5천억 원 정도를 투자할 계획이다.

지난해 4조 원과 비교해 절반 수준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지난해는 8세대 라인 신설, 6세대 라인 확장 등 신규 투자 프로젝트가 많았던 반면, 올해는 이 신규 라인을 본격적으로 가동하는 시점이라 인력과 시설투자가 그만큼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는 게 LG디스플레이 측의 설명이다.

SK그룹은 미래성장 동력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투자 계획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한 처지다.

금호아시아나그룹도 올해 투자 계획을 아직 확정하지 못했다.

다음 달 중순이나 돼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경기 상황이 좋지 않아 고심하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도 아직 투자 규모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작년 말부터 급속도로 진행된 세계 자동차 시장의 위축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할지 파악하기 어려워 사업계획을 세우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 대규모 사업들에 대한 투자는 예정대로 진행할 방침이다.

특히 현대·기아차그룹은 올 하반기 LPI 하이브리드 차량 출시를 시작으로 2012년 수소연료전지차 조기 실용화 등 친환경 차량의 성공적인 개발을 위해 연구개발본부 내 전자와 환경 부문 조직을 더 강화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차량의 핵심 부품인 하이브리드 변속기, 모터, 인버터, 리튬 배터리 등을 1차 협력업체들과 개발하고 있다.

아울러 현대·기아차그룹은 현대제철 일관제철소 부문에 2011년까지는 총 5조8천400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조선과 중공업계의 투자는 작년 수준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현대중공업은 시설보강에 1조4천300억 원, 연구개발에 2천367억 원을 각각 투자할 예정이다.

투자액은 시설분야가 작년보다 25% 줄었지만, 연구분야는 37% 늘어난 수치이다.

삼성중공업도 지난해 규모와 비슷한 8천억 원가량을 신제품ㆍ신공법 개발과 선박 건조설비 보강에 투입할 방침이다.

대우조선해양은 플로팅 도크 도입과 안벽 증설 등 설비 분야와 연구개발 분야에 올해 총 5천억 원을 투자한다.

두산중공업은 원천기술 확보와 생산설비 확충 등에 지난해와 비슷한 1조5천억 원 가량을 투자할 계획이다.

다만, 포스코는 지난해 4조9천억 원이었던 투자계획을 올해는 6조 원으로 늘려 잡았다.

투자계획 가운데 중점분야는 포항과 광양의 제강공장과 광양의 후판공장 등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올해 투자계획은 사상 최대규모"라고 전했다.

또 GS그룹도 2010년을 목표로 하는 중기 비전 달성을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한다는 계획에 따라 에너지와 유통, 건설 등 주력사업에 역량을 집중해 지난해 대비 약 10% 늘어난 2조3천억 원을 투자한다는 방침이다.

◇ 고용 계획도 `안갯속' = 삼성그룹 차원에서 이뤄지는 신규 채용 규모 역시 아직 '오리무중'이다.

작년에 삼성그룹은 한 해 동안 7천500명을 새로 뽑은 바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본격 리쿠르팅이 시작되는 3∼4월께나 채용 규모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LG전자도 채용은 아직 정확한 수요조차 파악되지 않은 상황으로, 적어도 1분기가 지나기 전에는 구체적 채용 계획을 잡기가 어렵다는 설명이다.

LG전자 일각에서는 채용 규모가 지난해 1천500명보다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대규모 해고를 피하려고 현재 임직원 임금 삭감과 휴가 등 `일자리 나누기(잡 셰어링)'로 버티는 하이닉스는 사실상 올해 의미 있는 신규 채용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다.

LG디스플레이는 올해 500명의 대졸 사무·기술직을 채용한다는 계획이다.

계획상으로도 지난해 1천 명과 비교해 50% 줄어든 수치이다.

현대·기아차그룹도 올해 채용규모를 정하지 못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지난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인턴사원 800여 명을 모집한 바 있으며 현대차와 기아차 해외 법인에서 근무할 글로벌 인턴 100여 명을 3년간 선발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조선과 중공업계도 올해 채용 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곳이 많다.

현대중공업은 아직 올해 채용계획을 잡지 못했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작년 수준인 300여 명가량의 대졸 신입사원을 뽑기로 하고 오는 5월께 서류접수를 시작할 예정이다.

두산중공업은 상ㆍ하반기에 나눠 총 800명 정도를 신규 채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포스코는 올해 고용규모를 그룹 전체로 봐서 지난해와 비슷한 2천 명 선을 유지한다는 계획이다.

현대그룹은 아직 내부적으로 별도의 채용계획은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대북 사업 문제가 첨예하게 걸린 현대아산이나 현대상선, 현대택배 등 어느 한 곳도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SK그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GS그룹 역시 3월 중으로 계열사별로 신규 소요인력을 파악하고 나서 올해 채용규모를 확정할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