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동독이 서독을 끌어안으며 본격화된 유럽 통합이 20년 만에 다시 분열되는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 "

로버트 졸릭 세계은행 총재는 18일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동유럽 경제위기와 관련,"EU(유럽연합)의 구제 노력이 절실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EU가 나서서 동유럽을 구제하지 못한다면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 균열이 생겨 유럽 통합이 깨질 수 있다는 경고다.

이처럼 EU 책임론이 나오는 것은 동유럽 국가들의 도미노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가 서유럽으로 전이돼 유럽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16개국) 은행들이 동유럽 금융사들에 대출해준 돈은 1조7000억달러에 달한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동유럽 대출이 무려 2776억달러다. 오스트리아 국내총생산(GDP)의 70%에 이르는 규모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각각 2199억달러와 2196억달러의 동유럽 채권을 갖고 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웨덴 등도 1000억달러 이상의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동유럽의 디폴트는 이 지역에 대출을 갖고 있는 서유럽 은행들의 부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헝가리가 동유럽 디폴트 도미노의 시발점으로 지목받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헝가리가 가장 위험하다"고 진단했다. 무디스도 "특히 헝가리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만약 동유럽의 경제위기가 유럽 다른 지역으로 퍼진다면 이는 전 세계의 무역과 일자리 그리고 번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했다. 더욱이 폴란드 체코 헝가리 라트비아 등 위기에 빠진 동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2004년 EU 우산 밑으로 들어온 신규 가입국이다. "동유럽 국가의 경제적 몰락은 회원국 탈퇴 등의 행동으로 이어져 유럽의 정치적 환경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영국 텔레그래프)는 지적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EU는 동유럽 국가 지원에 대해 미지근한 반응이다. 경제위기로 고전하고 있는 EU로선 '자기 코가 석자'이기 때문이다. 호아킨 알무니아 EU 경제 · 통화담당 집행위원은 "동유럽 국가들은 제각기 다른 상황에 놓여 있어 하나의 해법으로 다루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여기엔 유로존 가입국의 경우 재정적자 상한이 GDP의 3% 이내로 묶여 있어 함부로 정부 자금을 지원하기 힘든 상황도 깔려 있다. EU 산하 유럽경쟁위원회(EC) 역시 동유럽에 지원이 필요하지만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EU 차원의 지원엔 선을 그었다.

이런 가운데 동유럽 국가들은 위기 방어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폴란드 체코 등은 자국통화 가치 방어를 위해 금리 인하 계획을 포기하고 금리 인상으로 유턴하고 있다. 체코 중앙은행 관계자는 "최근 환율 상황을 감안할 때 금리 인하는 맞지 않다"며 "관심은 금리 인상폭"이라고 말했다. 폴란드도 당초 이달 중 0.5%포인트 이상의 금리 인하가 예상됐지만 금리 인하가 없을 것이란 얘기가 중앙은행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폴란드는 유로화 가입도 추진하고 있다. 폴란드 정부 관계자는 "수일 전부터 유럽중앙은행(ECB)과 함께 'ERM(유럽환율메커니즘)Ⅱ' 가입에 대해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ERMⅡ'는 유로화 도입을 위한 사전 관문으로 여기에 가입한 뒤 2년간 환율 변동 등에 문제가 없을 때 유로화 도입이 공식 허용된다.

안드리우스 쿠빌리우스 리투아니아 총리는 "동유럽의 가파른 경기침체가 서유럽 은행 위기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며 "EU 등을 통한 상호 조정된 협력 지원이 절실하다"고 촉구했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