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을 대상으로 한 정부의 '잡 셰어링(job sharing,일자리 나누기)' 정책이 딜레마에 빠졌다. 비대한 공기업들의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해 인력 감축을 권고한 지 얼마 안 된 터에 임금을 깎는 대신 사람을 늘리자는 이 정책이 부각됨에 따라 공기업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공기업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기획재정부도 분명한 방향을 잡지 못해 향후 공기업들의 잡 셰어링이 벽에 부닥칠 공산이 크다.

◆급여 깎으면 추가 고용 가능하다지만

한국수출보험공사는 노사 합의를 통해 3900만원인 대졸 신입사원의 초임을 3000만원 수준으로 25% 낮추는 대신 그만큼 신규 채용을 늘린다고 28일 발표했다.

수보의 현재 대졸 초임은 3900만원 선이다. 수보 노사는 이 중 900만원을 삭감해 3000만원 수준으로 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삭감된 대졸 초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며 상반기 임금 테이블 개정과 연계해 지속적으로 유지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올해 몇 명을 채용할 계획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아직 계획이 없다"고 답했다. 공기업 10% 비용 절감을 내건 재정부의 '경영 효율화 지침'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하고 나서야 신규 채용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졸 초임 과다' 문제를 언급한 이후 인천국제공항공사 수출보험공사 등 주요 공기업이 앞다퉈 대졸 초임 삭감을 통한 '잡 셰어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지만 이처럼 채용을 통한 나누기는 불투명하다. 전체적인 공공기관 인력 감축이라는 정부의 공기업 경영 효율화 취지와 어긋난다는 점 때문이다. 공기업 입장에서는 사람을 더 뽑으면 '몸집 불리기'가 되고,안 뽑으면 '고용 활성화를 외면한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임금을 깎는다"고만 발표하고 정작 신규 채용을 안 하는 '촌극'이 빚어질 가능성도 있다. 재정부에서 공기업의 구체적인 정원 조정 방안이 나와봐야 겠지만 인력을 줄이려면 기존 인력을 내보내는 것보다는 신규 채용을 안 하는 게 쉽기 때문이다. 정부는 줄어드는 인원의 50%까지 신규 채용을 병행할 것을 권고할 예정이지만 공기업이 그렇게 할지 의문이다. 결국 잡 셰어링이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건비 총액 줄인 만큼 정원 늘려줄까


그렇다면 방법은 '임금 총액'을 줄이면 정원 감축 제한 지침에서 예외를 두거나 거꾸로 인원을 늘릴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잡 셰어링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 정부도 이러한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했었다. 하지만 공기업 몸집 불리기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고 있다.

김용성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기존 공기업의 고용 형태와 똑같이 호봉제 정규직을 뽑는다면 초봉을 줄이더라도 연차가 올라갈수록 임금이 올라 결국 임금총액 한도를 초과하게 될 것"이라며 "공기업 직원은 해고도 쉽지 않아 인원을 불려 놓으면 경영 효율화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임시직 인턴 채용에 그치나

마지막 대안으로 정규직 대신 일자리 늘리기 차원에서 적은 연봉의 계약직 신입사원을 뽑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기존 정규직과 임금 격차가 커진다는 점이 문제다. 대졸 초임을 깎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임금체계를 손봐야 한다는 것인데 만만찮은 작업이다.

이에 대해 재정부 관계자는 "정부의 기본 입장은 기존 효율화 방침을 그대로 추진하되 탄력적으로 대졸 신규 채용을 늘리겠다는 것"이라며 "공기업 임금 문제는 노사협상 대상이기에 정부가 함부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현재 추진되는 공기업 인력 감축과 잡 셰어링은 조화롭게 병행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자칫하면 임시직 청년 인턴만 양산하는 형태로 잡 셰어링이 진행될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같은 상태라면 공기업이 겪는 딜레마는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차기현/류시훈 기자 khcha@hankyung.com

[ 용어설명 ]

잡셰어링(job sharing,일자리 나누기)=근로자 1인당 근무시간을 단축하는 대신 여러 사람이 함께 그 일을 나누어 처리하는 노동 형태.예를 들어 사업장의 잉여 노동력이 30%라면 이들을 해고하는 대신 1인당 작업량을 30% 줄이면 인 원을 감축하지 않고도 같은 생산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된다. 경제위기를 맞아 공기업부터 실천해보자는 게 정부 생각이다. 독일 폭스바겐 등 유럽의 제조업체들이 이러한 잡 셰어링을 통해 대량 실업 사태를 최소화한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