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실리콘 웨이퍼 제조회사인 M사는 지난해 황당한 일을 겪었다.

회사에서 17년간 근무한 기술연구실의 이모 팀장을 비롯해 10년 넘게 일한 기술진 12명이 1년 새 줄줄이 사표를 던지고 회사를 빠져 나갔기 때문.

이를 수상하게 여긴 회사 측은 이들의 동향에 주목했고 결국 새로 실리콘 웨이퍼 생산 사업에 진출하려고 하는 D사로 이들이 옮겨간 사실을 밝혀냈다.

M사는 자사의 핵심 기술이 경쟁사로 빠져 나갈 것을 우려해 최근 법원에 이씨 등을 상대로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핵심 기술을 빼내기 위해 기술인력을 스카우트하려는 기업 간 '인력 전쟁'이 갈수록 뜨겁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술 유출과 관련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은 217명.5년 전인 2003년의 86명에 비해 2배 넘게 늘었다.

자사에서 일하던 기술인력이 다른 회사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청구하는 민사소송인 '전직금지'나 '경업금지' 명목의 가처분 신청은 2007년 한 해에만 총 87건이 접수돼 2003년의 44건에 비해 역시 2배 늘었다.

해외 기술 유출도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적발된 건수(32건)는 2003년(6건)의 5배를 넘는다.

◆솜방망이 처벌이 불법 부추겨

핵심 기술인력이 빠져 나가는 가장 큰 원인은 노동시장의 유동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면서 연봉과 처우만 좋다면 경쟁사로 바로 옮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후발업체들이 앞서가는 기업들을 따라잡기 위해 어려운 기술개발보다 핵심 인력을 빼내는 쪽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작전'이 실패했을 경우 잃는 것보다 성공했을 때의 보상이 큰 점도 전직을 부추기는 또 다른 요인.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의 한 관계자는 "외환위기 때 기술인력들이 1차적으로 해고됐는데 그때 이후로 소속 기업에 대한 애착이 줄어든 것 같다"며 "일단 성공만 하면 보상이 크고 걸려도 실형을 사는 경우가 적어 조금만 나은 대우를 보장해 준다면 옮기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라고 설명했다.

◆핵심 기술 여부가 법원 잣대

전문가들은 인력 탈출을 통한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핵심 기술에 대한 보안조치를 철저히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기술인력이 가진 기술이 영업비밀인지 아닌지에 대해 법원은 해당 기술이 타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진짜 비밀인지,또 비밀을 금고에 보관하는 등 실제 비밀로 관리하고 있는지 등을 가장 중점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보안조치조차 소홀히 하는 기업들이 의외로 많다.

이 때문에 전직금지 등의 가처분 신청에서 피해 회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는 비율(인용률)은 30%를 조금 웃도는 수준으로 낮다.

전체 가처분 신청 인용률인 70%대의 절반 수준이다.

지식재산권 전문인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심지어 직원들의 책상에 꽂혀 있는 것을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포괄적인 전업금지 약정은 무효

하지만 법원도 무조건 기술인력이 회사를 옮기는 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이익만 보호하다 헌법상 보장된 개인의 생존권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회사 입사시 회사와 체결한 전업금지 약정이 현저하게 불합리하거나 △영업비밀이 통상적으로 알 수 있는 기술일 때 △영업비밀의 내용이 지나치게 광범위할 때 법원은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한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8월 교육 관련 회사인 O사가 신청한 경업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입사 직원과 5년간 내부에서 작업한 일체를 비밀로 해야 하고 동종 업계에 입사하거나 창업할 수 없다는 약정을 맺었으나 이것이 부당하다고 본 것.재판부는 "'영업비밀'은 구체적으로 특정되는 비밀인데 약정에서는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봤다"고 판시했다.

박민제 기자 pmj5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