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1일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지하철역 근처 작은 옷가게인 넥스트 매장. 오전 9시 문을 열자마자 고객이 몰려들었다. 40~50%의 세일광고가 유혹한 측면도 있지만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손님이 밀려든 것은 견조한 소비가 이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투자도 활발하다. 올해 성장률은 작년 2.8%보다 더 높아질 전망이다. 6월 말 들어선 고든 브라운 새 내각이 기업활력 증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영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장관이 있다. '비즈니스·기업 및 규제개혁부'를 새로 맡은 존 허튼 . 넥타이를 매지 않은 평상복 차림의 인터뷰 기사가 자주 실린다.

데일리 텔레그라프지의 인터뷰 제목은 '부(富)의 창조자 편에 서서'.

유럽 어느 나라보다 규제가 적고 금융시장이 자유롭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도 허튼 장관은 양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아직 남아있는 일부 까다로운 회계규정를 고치는 등 친기업정책을 지속적으로 펴겠다고 강조,기업들의 환대를 받고 있다. 원래 이 부의 이름은 '무역·산업부'였다. 옛 이름 대신 비즈니스와 규제개혁이라는 이름을 새로 붙인 것은 국내외에서 영국 비즈니스를 가장 경쟁력있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규제개혁은 관료주의를 말끔히 없애달라는 기업의 요구를 반영하겠다는 욕심이다. 허튼은 말한다. "규제는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지난 10년간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는 연 평균 성장률 3%에 육박하는 우등생 경제를 일궜다. 10년 전 7%를 넘었던 실업률은 5% 중반대로 떨어졌다. 그럼에도 블레어를 이어받은 브라운 정부는 주마가편의 채찍을 들었다.

브라운 내각은 특히 금융시장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데 만전을 기하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유로운 시장을 잘 지키겠다는 의욕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사모펀드의 무분별한 투자와 투명치 못한 자금운용에 관한 논란이 영국을 비켜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 재무장관이 된 알리스타 달링은 신중했다. 그는 "런던금융시장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성급한 규제조치를 취해선 안 된다"고 밝혔다.

강면모 한국은행 런던사무소장은 "달링 장관은 시장친화적인 감독을 해온 영국이 사모펀드를 규제할 경우 뉴욕에 다시 뒤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 같다"며 "규제 논의를 주도한 의회가 당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달링은 특히 경제정책방향을 밝히는 첫 연설에서 세금 단순화에 승부를 걸겠다고 약속했다.

2005년까지 영국보다 훨씬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던 독일도 앙겔라 메르켈이라는 새 리더십 아래 경제활성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20여분 가면 닿는 홱시트시의 카우푸호프 백화점 벽에는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밤 10시까지 영업한다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다. 작년만 해도 8시 이후에는 문을 열지 못했다. 메르켈이 규제를 완화한 덕택에 쇼핑 시간이 길어졌다.

내년부터는 기업들의 세금부담도 39.8%에서 29.8%로 10%포인트 낮아진다. 법인세와 영업세(매출에 매기는 세금)가 동시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정부 재정이 나빠지지 않도록 자본이득세를 도입하고 장기채무에 대한 이자의 손금산입한도를 절반으로 낮추기로 했지만 그래도 법인세 인하효과가 커 350여개 기업이 50억유로의 혜택을 보게 된다. 성장동력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조성에 애쓰고 있는 것이다.

독일이 올해부터 부가가치세를 16%에서 19%로 3%포인트 올렸을 때 경기가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았다. 그러나 그 충격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현대자동차 유럽법인의 조래수 부장은 "4~5월에는 판매가 30% 가까이 줄어드는 타격을 받았지만 6~7월에는 정상을 회복했다"고 말했다. 그 덕택에 올해 성장도 2.6%는 가능할 것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은 전망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데카뱅크의 수석이코노미스트인 울리히 케이터 박사는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우려가 높지 않아 부가세 인상 충격을 이겨나갔다"고 말했다.

유럽에선 늘 어느 나라가 '병자'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니콜라스 1세가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로 불러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런 오명은 1980년대 초까지는 영국, 2005년까지 독일이 물려받았다. 이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포르투갈이 그렇게 불린다. 프랑스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새 리더십으로 오명을 벗겠다며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프랑스가 환자 복을 벗어던진다면 유럽의 3대 강국인 영국 독일 프랑스는 유럽 대륙에 '뉴 다이내미즘'을 불어넣을 것으로 보인다.

런던·파리·프랑크푸르트=고광철 국제부장 gwang@hankyung.com